'미소를전하는사람'에 해당되는 글 61건

  1. [닮고싶은청년 vol.11] 홍대부여고에 꽃미남 교사 있어요? 6
  2. [닮고싶은청년들 vol.10] 교회는 이루어진 공간이 아니라 이루어가는 공간 1
  3. [달고싶은청년들 vol.8] "자원봉사는 1만큼의 사랑을 주고, 무한대의 사랑을 받는 일이예요."

그를 처음 만난 건 진달래가 붉게 익어가는 지난 4월 초 우양 졸업생 모임에서다. 홍대 안 작은 식당에서 진행된 졸업생 모임은 저녁시간에 진행 된 터라 다들 퇴근하고 오느라 7시 반이 넘어서야 사람들이 제법 모이기 시작했다. 그런 모임에 일찍 온 몇 사람은 늘 눈에 띄게 마련이다. 그 역시 아주 일찍 도착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인터뷰를 위해 청년팀 담당자를 통해 처음 인사를 나눴다. 나중에 그가 졸업생 모임에 빨리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됐다. 그는 홍대부여고 교사였다. 그런 그를 벚꽃 흐드러지게 핀 오후 교정에서 다시 만났다. 수업이 끝나고 청소하고 돌아오는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좋다고 낄낄댄다. 치마를 입고가기 다행이다.

 

선생, 소성욱. 나는 감성적인 교사다

수시녀를 아십니까. 수요일에 시 읽어주는 여자의 줄임말이다. 소성욱(만 29세)씨가 담임으로 있는 홍대부여고 3학년 3반은 독특한 학급이다. 1인 1역할이라고 들어봤는가. 이 학급에서는 모두가 하나씩의 자기 역할을 가지고 있다. 수시녀도 그 일환으로 생겨났다. 세 명의 학생이 수요일 아침 조회시간에 본인이 준비해온 시를 한 편씩 읽는다. 물론 자발적인 일이다. 학생들이 화분을 가지고 오면 화분이름 옆에 학생이름을 붙어 이름표를 달아준다. 이를테면 ‘진달래 박은지’ 식이다. “처음에는 제가 화분 몇 개를 반에 갖다 놓아요. 아이들한테는 가지고 오면 이름을 붙여준다 말하죠. 며칠이 지나면 진짜 아이들이 화분을 가져오는 거예요. 전 약속대로 이름을 붙어주죠. 도시아이들에게 자신이 무언가를 스스로 가꾸는 일을 놀라운가 봐요.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이런 아이디어는 모두 소성욱씨 머리에서 나왔다. 여고에서 인기 끌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란 말인가. 인기 꽤나 있어 보이는 교사다. 

 

우양과의 인연은 간단했다. 복학 후 과 게시판에서 공고를 봤다. 그 당시 친구들과 야심차게 첫 해외여행을 준비했던 터였다.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로 떠나기 전 날 우양재단 면접에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연히 면접에 갔다. 그 때 인생 첫 비행기를 놓쳐서 아직까지 비행기를 못 타봤단다.

학생 소성욱 씨는 선생이 되고 싶었다. 공부를 더 해서 교수가 될지 교사가 될지가 고민이었다. 그는 그의 삶을 결정 하게 했던 한 권의 책을 소개했다. 바로 막스베버의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다. 그는 이 책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뒤쳐진 사람이 자기를 앞질러 갈 때 아무런 마음의 동요 없이 지켜봐야 한다.’ 라는 말에 그의 진로를 결정했다.

석사를 마치고 교수에 대한 꿈을 놓았다. 그렇다고 아예 꿈이 없는 건 아니다. 그는 기회가 되면 EBS강사도 하고 싶단다. 작고 소박한 기회들을 만들어 이루어 가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꿈을 이루어 가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선 판서학원부터 등록할 일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악필이란다.)

인생의 질척한 땅을 굳은 땅으로

이제 서른 살. 졸업 후 바로 교직생활을 시작해 벌써 5년차 선생인 소성욱씨는 운동을 좋아하는 보통남자다. 대학 시절 축구부를 할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고 지금은 우양 졸업생과 재학생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우양FC에서 매달 축구를 한다. 저녁마다 조깅을 해서 무려 6kg을 감량한 그는 훤칠한 키에 다부진 몸매로 남자다움을 과시한다. 여고에서 교사생활 하려며 이정도 자기관리는 필수라면 농담도 던진다. 이런 그가 이렇게 운동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따로 있다.

5살 때 화상을 입어 죽다 살아났다. 아직도 왼쪽 팔과 다리에 화상의 흉터가 있다. 어릴 때 당한 ‘사고’ 는 말 그대로 누구의 책임도 아닌 그냥 사고였다. 하지만 화상은 그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에도 상처를 남겼다. 그 당시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본인의 치료비로 많은 돈이 들어가는걸 보고 소성욱씨는 더욱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에게도 질 수 없었고 대충 할 수도 없었다.

대학에 입학할 때 그는 사회교육과만 지원했다. 하고 싶은 것은 분명했다. 서울대 사회교육과에 합격한 그는 누구보다 선생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만 서면 눈 밑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숫기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우연한 계기로 교내 대학생활문화원에서 1:1 상담을 받았고 그 시간을 통해서 그는 스스로 ‘건강해졌다’ 고 말한다. 화상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심리적으로 그를 위축되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 후 교생실습을 나갔는데 학생들 앞에서는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교사가 체질임을 직감했다.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함께 찾아주고, 행복해질 수 있는 일는 돕는 교사가 되고 싶어요.” 그는 아이들이 스스로 느끼기 전까지 교사의 훈육은 별로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지지와 격려가 가장 중요하단다.

 

사회교사로서 그는 아이들에게 매번 당부한다. “누굴 지지하던지 상관없다. 단지 정치에 절대 무관심해지지 마라.” 최근 총선을 치르면서 졸업한 아이들에게 카톡으로 투표를 독려할 정도니 아이들의 대한 사랑, 직업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회생활의 선배이자 교사로서 지금의 대학생들에게 한 마디 해달라고 했다. 그는 주저 없이 말한다. “대학생 때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해요. 분야를 가리지 말고요. 책, 사회참여, 봉사활동, 연애 등등 많잖아요.”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지 나중에 자기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에 내공이 생기고 그래야 깊이 있는 사람이 되지 않겠냐며 오히려 되묻는다. 그리고 덧붙인다. 1,2학년 때부터 고시공부 하지 말아야 한다. 이건 본인에게도 불행한 일이고 사회도 불행한 일이다. 만약에 그렇게 공부해서 판사가 됐는데 아기 분유 살 돈이 없어 분유를 훔친 사람을 판결할 때 법전에 있는 판결만 하지 않겠냐는 이유에서다.

“취업에만 목매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지름길처럼 보이지만 결국 둘러가는 길이잖아요.” 누가 그랬다. 삼십대의 성숙의 척도는 ‘유연성’이라고. 이제 딱 삼십인 소성욱씨에게서 여느 또래와 같은 경직된 모습은 찾아볼 수 가 없다. 그가 사회생활을 빨리 시작해서, 엘리트 코스에서 전향한 교사이기 때문에가 그 이유가 아니라 진솔한 말 속에서 묻어나는 여유가 그를 성숙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다.

경남 거창 출신으로 아직도 사투리가 고쳐지지 않아 수업시간에 말만 하면 아이들이 낄낄 웃어서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나중에 지나고 보니 이것도 나름 아이들을 집중시키는 본인만의 장점임을 알게됐단다. 시골 총각의 서울 교사 생활기는 두고두고 들어도 재미있는 이야기다.

 


 

그와의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입에 맴돌았다. 나이 받침에 ‘니은’자가 들어가면 가져갈 것은 가져가고 포기해야 한다는 김광석의 노랫말에 절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나이 서른. 문득 이제 막 시작한 소성욱씨의 서른이 그러기를 바래본다.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한 사람을 만나고 사귀고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지 시간의 문제라고 하기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련, 유혹, 고통 그리고 기쁨은 늘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문제기 때문이다. 그를 만난 장소 역시 남다르다. 100교회 목회자 성지순례 여정 중에 만났다. 이집트, 이스라엘 그리고 비로소 요르단에 넘어와서야 그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눴다. 시간은 넉넉하지 않았다. 장소는 요란했고 어두웠다. 그러나 그와의 대화는 진솔했다. 우린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누구를 이해한다는 것은 장소와 분위기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삶의 정오에서야 비로소 이해된다.’ 는 것을 말이다.

 

나를 이근원이라 불러주오.

인간이 삶의 의문을 제기할 때는 언제인가. 바로 높이와 풍부함을 얻고자 할 때다. 삶은 높아지고자 할 때 분명 기존의 뭔가와 싸운다. 이근원씨 역시 그렇다. 10년 전 이집트 피라미드를 혼자 여행 할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까지 했다. 함께 손잡고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갔던 이야기는 성지순례 내내 회자되었다. 그런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3년 전 아내가 뇌종양 선고를 받은 것이다. 큰 병원비를 감당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 부부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때 우양재단을 통해 얼마만큼의 병원비를 지원받았다. 이근원씨는 이때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하심을 느꼈다고 한다.

 

성지순례 기간 내내 여느 목사님들 과는 달리 혼자 사색에 잠겨있는 이 목사는 흔한 디지털 카메라 하나 손에 들지 않았다. 처음 오는 여행지가 아니어서인지 남들과 다른 여유로움도 묻어난다. 100여 명의 대규모 무리. 순례의 여정 속에 남들과 다른 옷차림과 분위기로 궁금증을 자아냈던 그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구속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그에게서 노마드적인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니 호기심은 증폭됐다.

 

다같이 놀자 양평교회에서

경남 거창, 양평마을. 할머니 7, 아이들 조금, 중고등부 조금. 매 주일 12~15명 정도가 빙 둘러 앉아 예배를 드린다. 양평교회에는 강대상이 없다. 예배 형식이야 당연히 있지만 이목사가 설교하는 도중에 누군가 말을 하면 순간 딴 길로 새기 일수다. 그게 뭐 그렇게 큰 문제겠는가. 그저 방바닥에 둘러앉아 이야기 하는 자체가 예배인 것을 이 교인들은 잘 아는 것 같다.

 

감리교 수련목 이후 목사안수를 받고 첫 사역지인 양평교회. 벌써 9년째 한 교회에 머물며 살고있는 그에게 목회는 어떤 의미일까. 그는 한 순간도 어려웠던 적이 없다. 순진한 할머니들과 노는 것이 재미있다. 할머니들은 매일 싸우지만 말리지 않는다. 교회는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나. 양평교회 교인들은 평생 처음 교회에 나온 분들이 대부분이다. 어떤 어르신은 십자가에 합장하고 들어오신다. 교회가 어떤 곳인지 모르는 분들이다. 그래서 더 재미있다. 그게 문제인가. “이분들은 단순히 성도가 아니예요. 식구죠.” 그의 말이다. 아래채 예배당에서 예배가 끝나면 윗채에 올라와 밥을 먹고 차를 마신다. “예배는 결국 밥상으로 끝나야 해요.” 이제야 성도가 아니라 식구라는 말이 이해가 된다.

 

교회는 교회기만하고 세상은 세상이기만 하다.”

이 목사는 소통의 중요함을 강조했다. 매년 성탄절 등 절기 행사 때마다 나름의 주제를 정해 마을 축제로 진행한다. 재작년에 ‘Fun Fun한 크리스마스에 이어 작년 크리스마에스는 이웃에게 말을 걸다.’ 는 주제로 마을 회관에서 중고등부 아이들이 공연도 하고 함께 떡국도 끓여 먹었다. 분위기는 물어볼 것도 없이 좋았다. 교회의 분명한 역할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행사였다.

 

어쩌면 일어날지 몰라, 기적

그는 지금 작은 공간을 만들었다. 마을 어르신이 무상으로 땅을 빌려줬고, 또 어떤 누군가가 건물을 빌려줬다. 이들 누구도 주인이라고 우기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도 주인이 아닌 공간이 생겼다. 그는 그곳에 이름을 사람 책 도서관이라고 붙였다.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란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도서관이라 하면 으레 책을 빌리기 마련인데 이 곳에서는 책 대신 사람을 빌려 읽는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여행 책이 되어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목 받지 않는 소방관이 미혼모가 동성애자가 스스로 책이 되어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다. ‘리빙 라이브러리바로 그가 꿈꾸는 살아있는 도서관이다. “책을 읽는 건 사실 대화하는 거예요.” 아직은 미비하지만 이런 공간이 존재한다는 생각만으로도 흥분된다.  

 

교회는 이루어진 공간이 아니라 이루어가는 공간이예요.”  

교인이 아니더라도 주위에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을 초대하고 이야기한다면 어떨까. 공동체라고 꼭 한 공간에 모여 살아야 하는가. 이목사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그게 바로 공동체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교회, 마을이 아니라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공동체. 고정된 틀 속에서 교회는 이래야 한다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본질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고립된 삶에서 함께하는 삶으로.  

 

잠시 쉬어가는 여행, 성지순례

성지순례의 참여한 사람 대부분이 목사이고 남자인지라 약간의 편견을 가지고 물었다. 성지순례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는 같은 형편의 사람들끼리 성경에 있는 성지를 돌아보고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 하는 것 만으로도 의미 있다고 했다.

그는 기억에 남는 성지로 이집트 모카탐 언덕에 오를 때를 꼽았다. 모태신앙으로 평범하고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해왔다. 어릴 때 아침마다 가정예배를 드렸고 청소년기에는 교회에 대한 반항심도 있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어쩌다신학생이 됐다고 한다. 그런 그가 모카탐을 오르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단단함에 놀랐다. 무슬림으로부터의 조롱 속에서도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는 그들을 보니 가슴이 짠해왔다. 

 

처음에는 그저 말랑하게 보였던 그였는데 대화를 하고 있자니 말랑함 속에 단단함이 느껴진다. 이유를 찾았다. 그는 인생의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아버지를 꼽았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억척스럽게 일 하시는 아버지는 궂은 일 마다하지 않으시는 단단한 분이었다. 아버지의 신앙은 인생 못지 않게 고집 있는 단단함이 있었다. 이 목사는 그런 그의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을까. “우리 아버지는 단단하신 분이예요.” 라는 말이 마치 우리 하나님은 단단하신 분이예요.” 처럼 들린다.

 

한번은 아내가 물었다. 당신이 원하는 목회는 뭐냐고. 한참을 고민했다. 나는 무엇을 보며 달려가는가. 여전히 고민 중이다. 그는 정의와 평화, 화해 그리고 용서에 관심이 있다고 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틀린 것인데 지적하고 바로잡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솔직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미 그는 어쩌면 많은 것을 용서하고 이해하며 사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Happy virus, 양평교회. 그가 현재 운영하는 블로그 이름이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간은 아니다. 현재의 삶을 차곡차곡 쌓아 두는 공간이다. 삶이 무료해질 때 경남 거창 양평교회에 들려보시라. 특별하지는 않지만 남다른 삶의 탈출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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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우리 어르신들 괜찮으실까 모르겠어요! 박미선 씨의 목소리가 분주하다. 그는 최근에 우양재단 마포구 지역 담당자(관리자)로 일을 시작했지만, 완전히 낯선 얼굴은 아니다. 벌써 5년째 봉사활동을 해오다가 승진(?), 말 그대로 취미가 일이 된 경우다. 

원래 그는 지역에서 피아노 레슨을 하고, 자녀들 대학입시 뒷바라지하고, 남는 시간에 둘레 길을 걷던 평범한 아줌마다. 그러던 그녀가 마포구 100여 가구의 어르신들을 돌보는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하나하나 안부상황 체크하고, 전화상담하고, 반찬 나누고, 쌀 배달도 해야 하는 바쁜 일이다. 그녀는 어떻게 프로페셔널 자원봉사자의 세계에 들어왔을까?

 

부담감 

기업의 해외주재원인 남편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살던 그는 자녀의 대학입학과 함께 한국으로 들어 왔다. 당시 미대입시를 준비하는 딸을 학원에 보낸 뒤, 남는 시간 활용을 궁리하다가 우양과 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자카르타에 있을 때 경험이 저를 자원봉사자의 세계로 불렀지요.” 

그가 오랜 기간 거주했던 자카르타의 한국학교 옆에는 고아원이 있다. 그는 우연히 고아원 아이들의 낯빛에서 한국인의 그것을 느꼈다. “딱 봐도 한국 피가 섞여 보이는 아이들이 있는 거예요 박 씨는 가슴한쪽에서부터 이는 부담감을 못 이기고 고아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일본, 독일 등 해외에서 봉사하러 오는 사람이 많았는데, 유독 한국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워 안타까움을 느끼기도 했다고.

엄마들은 아이들 다 길러놓고 나면 시간이 많이 생기잖아요. 그 시간에 봉사활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해외생활을 접고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에 자원봉사하면서 만난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리고 그렇게 어울려 지금까지 봉사활동을 한 거죠.”

계속되는 안타까움

대상은 고아에서 독거노인으로 달라졌지만, 사람에게 관심을 쏟고 사랑을 주고받는 일은 동일하다. 그는 봉사 초기에 만난 한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감회에 젖는다.

성격이 까칠한 할아버지가 계셨어요. 전기제품을 잘 고치는 분이셨는데, 그러다보니 항상 방 안 전체가 폐전기제품으로 가득 차 있었죠. 그분이 처음에는 머쓱해 하시고, 화를 내기도 하셨는데 , 저희가 자꾸 찾아뵈니까 고장 난 라디오를 고쳐서 선물로 주는 등 관심을 표현하더라고요. 사람이 그리우셨을 거예요.”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그 할아버지는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이내 돌아가셨다. 사람의 생사가 사람의 잘못은 아니건만, 박 씨는 책임감을 느낀다.

혈연도 전혀 없었던 분인데, 저라도 가족처럼 지낼 수 있었을 텐데. 더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던 게 안타까워요. 언젠가 시장에 갔다가 맛있어 보이는 죽이 있어 사들고 방문했었는데요.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몰랐죠. 그때 그렇게나 반갑게 맞아 주시던 그 모습을 잊지 못하겠어요

그렇게 자원봉사로 시작해 지역 담당자가 된 그의 바람은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더 귀담아 들어주고 싶다는 것이다. 특별한 기술 같은 건 없다. 어르신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 손을 붙잡고, 그분들의 힘겨운 인생여정을 공감해줄 따름이다.

 

 

이제는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싶어요

어르신들은 저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젊었을 때 이야기 같은 거요, 그걸 들어주는 사람이 필요해요. 정이 그립고, 사람의 체온이 그리워서 그러시는 거니까요. 아파서 누워계시다가도, 자신의 이야기하시다가 오히려 힘을 얻고 일어나신다니까요.”

박 씨는 자꾸 돌아가신 분들이 떠오른다. 삶에는 언젠가 끝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이를 준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주류사회에서 소외된 독거어르신들은 말할 것도 없다. 안타까운 환경에서 생명이 꺼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래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호스피스 활동이다.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도록, 죽음을 인생의 단계로 받아들이도록 도와주는 조력자가 되려는 것이다.

고통과 불안 속에서 임종을 맞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이 배우자, 가족과 화해할 수 있도록 돕고, 기도해주고 이런 일에 관심이 생겼어요. 이게 제 일인 것 같아요.”

그는 이미 호스피스 교육을 받고 3년째 활동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교육을 받은 강남 성모병원에서 활동을 시작했는데, 그래도 병원에서 돌아가시는 분들은 가족도 있고, 돈도 있는 분들이란 생각에,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조그만 단체로 봉사 장소를 옮겼다. 그곳에서는 평범한 이웃들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거기가면 절반은 연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에요. 바로 얼마 전에도 제 손 붙잡고 돌아가신 분이 계셔요. 그 시설 사람들은 하나같이 지병도 가지고 있더라고요, 그분들 각자의 사연을 들어 드리고, 마사지도 해드리고 그러는 게 저한테는 의미가 있게 느껴졌어요.”

 

때문이죠.

 우양에서 어르신들 만나는 것과 동일한 마음이다. 봉사를 해본사람은 알겠지만, 일방적인 도움이 아니다. 박 씨에 따르면 오히려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하고, 감사한 마음이 들게 된다.

 한 달에 한두 번 방문하고, 음식 가져다주는 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누군가의 관심을 받고 있는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위로를 받을 수 있는데요. 얼마 전에 설 잔치를 했는데, 어떨 할머니가 집에 가는 길에 나는 몸도 불편하고 가진 게 없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하나님한테 당신을 위해 빌어주는 거뿐이야라며 기도를 해주셨어요. 제가 1만큼 시간을 들여 뭔가를 해 준건데, 무한대의 사랑을 받은 기분이었어요.”

 박미선 씨는 호스티스 교육을 받으며 배운 것들을 우양 쌀 가족과도 나누고 싶다. 그게 아니라도 뭐든지 주고 싶다. 어르신들에게 사랑을 받은 게 더 크다는 생각에서다. 이런 사소하지만 큰 보람과 기쁨이 그를 우양재단 근처에서 오랜 기간 머물게 했고, 그렇게 쌓인 정이 박선선 씨를 우양재단의 베테랑 봉사자로 만들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제가 만나 뵙는 어르신들도 익숙한 곳에서 편안하게 생을 마치도록 도움이 되고 싶어요. 어르신들이 외롭게 돌아가시지 않게 하고 싶어요. 어르신들에게 죽음이 무척 두려운 거잖아요.”

 

처음에 자원봉사활동 시작한 건, 제가 남들보다 뭔가 하나라도 더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어요. 솔직히 남들 앞에서 잘나게 보이고 싶어서죠. 비록 그런 이유로 일을 시작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의 존재가치를 찾게 된 소중한 계기였던 거 같아요. 남편과 자녀들에 의지하지 않고, 저 스스로 의미 있는 존재가 되었어요.”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어떤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깨달았다는 박미선 씨는 를 찾는 여행을 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누군가를 돕는 일이 본인 스스로를 돕는 일이 될 수 있음을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부디 우양과 함께하는 다른 자원봉사자들도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해 나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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