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만난 건 진달래가 붉게 익어가는 지난 4월 초 우양 졸업생 모임에서다. 홍대 안 작은 식당에서 진행된 졸업생 모임은 저녁시간에 진행 된 터라 다들 퇴근하고 오느라 7시 반이 넘어서야 사람들이 제법 모이기 시작했다. 그런 모임에 일찍 온 몇 사람은 늘 눈에 띄게 마련이다. 그 역시 아주 일찍 도착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인터뷰를 위해 청년팀 담당자를 통해 처음 인사를 나눴다. 나중에 그가 졸업생 모임에 빨리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됐다. 그는 홍대부여고 교사였다. 그런 그를 벚꽃 흐드러지게 핀 오후 교정에서 다시 만났다. 수업이 끝나고 청소하고 돌아오는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좋다고 낄낄댄다. 치마를 입고가기 다행이다.

 

선생, 소성욱. 나는 감성적인 교사다

수시녀를 아십니까. 수요일에 시 읽어주는 여자의 줄임말이다. 소성욱(만 29세)씨가 담임으로 있는 홍대부여고 3학년 3반은 독특한 학급이다. 1인 1역할이라고 들어봤는가. 이 학급에서는 모두가 하나씩의 자기 역할을 가지고 있다. 수시녀도 그 일환으로 생겨났다. 세 명의 학생이 수요일 아침 조회시간에 본인이 준비해온 시를 한 편씩 읽는다. 물론 자발적인 일이다. 학생들이 화분을 가지고 오면 화분이름 옆에 학생이름을 붙어 이름표를 달아준다. 이를테면 ‘진달래 박은지’ 식이다. “처음에는 제가 화분 몇 개를 반에 갖다 놓아요. 아이들한테는 가지고 오면 이름을 붙여준다 말하죠. 며칠이 지나면 진짜 아이들이 화분을 가져오는 거예요. 전 약속대로 이름을 붙어주죠. 도시아이들에게 자신이 무언가를 스스로 가꾸는 일을 놀라운가 봐요.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이런 아이디어는 모두 소성욱씨 머리에서 나왔다. 여고에서 인기 끌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란 말인가. 인기 꽤나 있어 보이는 교사다. 

 

우양과의 인연은 간단했다. 복학 후 과 게시판에서 공고를 봤다. 그 당시 친구들과 야심차게 첫 해외여행을 준비했던 터였다.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로 떠나기 전 날 우양재단 면접에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연히 면접에 갔다. 그 때 인생 첫 비행기를 놓쳐서 아직까지 비행기를 못 타봤단다.

학생 소성욱 씨는 선생이 되고 싶었다. 공부를 더 해서 교수가 될지 교사가 될지가 고민이었다. 그는 그의 삶을 결정 하게 했던 한 권의 책을 소개했다. 바로 막스베버의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다. 그는 이 책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뒤쳐진 사람이 자기를 앞질러 갈 때 아무런 마음의 동요 없이 지켜봐야 한다.’ 라는 말에 그의 진로를 결정했다.

석사를 마치고 교수에 대한 꿈을 놓았다. 그렇다고 아예 꿈이 없는 건 아니다. 그는 기회가 되면 EBS강사도 하고 싶단다. 작고 소박한 기회들을 만들어 이루어 가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꿈을 이루어 가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선 판서학원부터 등록할 일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악필이란다.)

인생의 질척한 땅을 굳은 땅으로

이제 서른 살. 졸업 후 바로 교직생활을 시작해 벌써 5년차 선생인 소성욱씨는 운동을 좋아하는 보통남자다. 대학 시절 축구부를 할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고 지금은 우양 졸업생과 재학생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우양FC에서 매달 축구를 한다. 저녁마다 조깅을 해서 무려 6kg을 감량한 그는 훤칠한 키에 다부진 몸매로 남자다움을 과시한다. 여고에서 교사생활 하려며 이정도 자기관리는 필수라면 농담도 던진다. 이런 그가 이렇게 운동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따로 있다.

5살 때 화상을 입어 죽다 살아났다. 아직도 왼쪽 팔과 다리에 화상의 흉터가 있다. 어릴 때 당한 ‘사고’ 는 말 그대로 누구의 책임도 아닌 그냥 사고였다. 하지만 화상은 그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에도 상처를 남겼다. 그 당시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본인의 치료비로 많은 돈이 들어가는걸 보고 소성욱씨는 더욱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에게도 질 수 없었고 대충 할 수도 없었다.

대학에 입학할 때 그는 사회교육과만 지원했다. 하고 싶은 것은 분명했다. 서울대 사회교육과에 합격한 그는 누구보다 선생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만 서면 눈 밑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숫기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우연한 계기로 교내 대학생활문화원에서 1:1 상담을 받았고 그 시간을 통해서 그는 스스로 ‘건강해졌다’ 고 말한다. 화상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심리적으로 그를 위축되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 후 교생실습을 나갔는데 학생들 앞에서는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교사가 체질임을 직감했다.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함께 찾아주고, 행복해질 수 있는 일는 돕는 교사가 되고 싶어요.” 그는 아이들이 스스로 느끼기 전까지 교사의 훈육은 별로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지지와 격려가 가장 중요하단다.

 

사회교사로서 그는 아이들에게 매번 당부한다. “누굴 지지하던지 상관없다. 단지 정치에 절대 무관심해지지 마라.” 최근 총선을 치르면서 졸업한 아이들에게 카톡으로 투표를 독려할 정도니 아이들의 대한 사랑, 직업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회생활의 선배이자 교사로서 지금의 대학생들에게 한 마디 해달라고 했다. 그는 주저 없이 말한다. “대학생 때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해요. 분야를 가리지 말고요. 책, 사회참여, 봉사활동, 연애 등등 많잖아요.”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지 나중에 자기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에 내공이 생기고 그래야 깊이 있는 사람이 되지 않겠냐며 오히려 되묻는다. 그리고 덧붙인다. 1,2학년 때부터 고시공부 하지 말아야 한다. 이건 본인에게도 불행한 일이고 사회도 불행한 일이다. 만약에 그렇게 공부해서 판사가 됐는데 아기 분유 살 돈이 없어 분유를 훔친 사람을 판결할 때 법전에 있는 판결만 하지 않겠냐는 이유에서다.

“취업에만 목매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지름길처럼 보이지만 결국 둘러가는 길이잖아요.” 누가 그랬다. 삼십대의 성숙의 척도는 ‘유연성’이라고. 이제 딱 삼십인 소성욱씨에게서 여느 또래와 같은 경직된 모습은 찾아볼 수 가 없다. 그가 사회생활을 빨리 시작해서, 엘리트 코스에서 전향한 교사이기 때문에가 그 이유가 아니라 진솔한 말 속에서 묻어나는 여유가 그를 성숙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다.

경남 거창 출신으로 아직도 사투리가 고쳐지지 않아 수업시간에 말만 하면 아이들이 낄낄 웃어서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나중에 지나고 보니 이것도 나름 아이들을 집중시키는 본인만의 장점임을 알게됐단다. 시골 총각의 서울 교사 생활기는 두고두고 들어도 재미있는 이야기다.

 


 

그와의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입에 맴돌았다. 나이 받침에 ‘니은’자가 들어가면 가져갈 것은 가져가고 포기해야 한다는 김광석의 노랫말에 절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나이 서른. 문득 이제 막 시작한 소성욱씨의 서른이 그러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