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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닮고싶은청년 vol.19] 환경과 먹거리문제의 대안적문화를 꿈꾸다 1
  2. [닮고싶은 청년 vol.18]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나요
  3. [닮고싶은청년 vol.17] 하나님은 도시에서만 일하시나요? 1

 

 

환경과 먹거리문제의 대안적문화를 꿈꾸다

 

27살이 되면서 그녀가 새로 얻은 직함은 ‘이사장’이다. 이 타이틀로 벌써 수차례 인터뷰를 했다. 잡지나 신문은 물론이고 티비에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녀는 요즘 ‘대세’다.

 

대학동아리에서 협동조합으로

그녀가 이사장으로 있는 씨앗들협동조합(이하 ‘씨앗들’)은 얼마 전 ‘5회 레알텃밭학교’를 개강했다. 신규조합원들도 여럿이 생겼고 마포구에 있는 성미산학교 학생들도 농사짓기에 참여하고 있다. 왜 이렇게 주목을 받게 되었을까 물으니 타이밍이 잘 맞았단다. “서울시에서 도시농업을 권장하고 있고 협동조합도 붐처럼 늘어나고 있어요. 그 중에서도 청년들이 모이는 모임이라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아요”

도시농업, 협동조합, 청년 등의 핫한 아이템으로 단숨에 이슈가 된 듯 보이지만 ‘씨앗들’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단체는 아니다. 2010년 대학교 안 버려진 땅을 텃밭으로 가꾸고자 하는 학생들이 모여 대학텃밭네트워크‘씨앗뿌리는사람들’을 만들었다. 그 후 대학텃밭을 보급하고 ‘레알텃밭학교’를 운영하면서 4년째 농사를 짓고 있다.

‘씨앗뿌리는사람들’의 주요멤버로 참여하던 윤지 씨와 몇몇의 친구들은 2013년 2월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농사는 이미 그들에게 큰 생활감으로 자리했다. 대학졸업과 동시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기엔 아쉬움이 컸다. “협동조합에 대한 제안을 처음 했을 때 친구들은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이었어요. 이전에 책 모임을 하면서 협동조합이 우리사회의 좋은 대안이 될 거라고 나눈 적이 있었어요. 격 없이 가능한 모든 사람의 의견을 반영하려는 우리 모임과 잘 어울릴거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이렇게 2012년 12월 ‘씨앗들’이 탄생했다.

 

 

서구화된 먹거리문화의 대안을 찾다

윤지 씨는 서구화된 먹거리문화의 대안책으로 도시농업을 시작했다. 그녀는 비건(Vegen : 완전한 채식주의, 모든 동물성제품을 사용하거나 섭취하지 않는 채식주의자)은 아니지만 육류섭취를 최대한 삼가는 채식주의자이다. 그녀가 처음 채식을 시작한 2010년은 우리사회에서 채식이 훨씬 낯설었다. 육류섭취를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다른 이의 눈에 까다로운 모습으로 비춰지기 일쑤였다. “어느 식당을 가던지 온전히 채식을 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한식은 원래 채식위주의 식단이잖아요. 서양의 식문화가 우리 사회에 깊숙이 들어온 후로 고기가 빠지면 왠지 식단이 허전하게 느껴지는 거죠.” 이렇게 고군분투하던 중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친구들을 만났다. 그리고 함께 농사짓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친환경이라는 키워드에 관심이 많다. 채식을 하는 이유도 친환경적이지 못한 도축시스템을 반대하는 의미가 크다. 농사는 이러한 가치를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텀블러 사용이나 음식물남기지 않기 등도 윤지 씨가 중요하게 여기는 실천 중 하나이다. “‘씨앗들’조합원 중에서는 단순히 농사에 대한 호기심으로 조합에 합류하는 이들도 많아요. 이런 친구들과 농사와 친환경적인 생각을 나눌 때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몰라요. 저희는 매해 농촌으로 엠티를 가는데요. 그때마다 일회용품을 쓰지 않으려고 수저하나까지 다 챙겨다가보니 짐은 어마어마해져요.”

“채식나 농사 그리고 다른 환경운동은 혼자였으면 힘들었을 거예요. 함께 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서로에게 자극이 되고 힘이 되요.” 윤지 씨는 ‘씨앗들’이 만나서 함께 농사를 지을 뿐 아니라 공동체를 이룰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서 오늘날의 환경과 먹거리 문제의 대안적 문화를 만들고자 한다.

 

 

 

자연의 아름다움 끊임없이 탐구하다

3월이 되면서 윤지 씨는 대학원생이 되었다. 평소부터 관심 있었던 미학을 공부한다.

“학교에서는 주로 그림이나 조각 등의 예술작품을 보고 공부하지만 저는 그 어떤 예술품보다 자연 그 자체가 아름답다고 생각해요. 농사를 짓다보면 금방 뒤집어준 흙이나 새싹이 때론 죽어가는 풀이 아름답다고 느껴지니까요. 생태미학이 아직 확실히 자리 잡힌 분야는 아니지만 앞으로 연구해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삶과 학문에서 끊임없이 자연을 고민하는 그녀가 건강해보였다.

시멘트 건물로 꽉 찬 대도시의 삶에서 작은 텃밭을 소중히 여기는 그녀다. 이젠 만들어진 아름다움이 가득한 이 사회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탐구하고자하는 그녀를 열렬히 응원해주고 싶다.

 

 

 

 

그새 또 멈추어 있다. 괜찮은 식당을 알고 있다며 앞서 걷는 듯하더니 보이는 가게마다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길을 잃은 걸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렇다 하기엔 표정이 너무 밝다. 그녀는 아기자기한 상점이 많은 신촌의 어느 골목을 한참이나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김송희씨는 현재 서강대에 다닌다. 서강대에 다니는 여학생이라면 신촌 골목골목 예쁜 상점들을 내 집 드나들 듯이 다녔을 만도 한데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다. 이런 그녀가 지난 1월에는 고등학생인 두 동생과 함께 인도여행을 다녀왔다.

“제가 역사를 좋아하거든요. 인도는 이야기도 많고 유적지도 많아서 재미있었어요.” 첫 해외여행으로 떠나기 녹록치 않은 여행지이지만 송희씨에게 잘 어울리는 여행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송희씨의 꿈은 유엔난민기구에서 일하는 것이다. 탈북 후 태국에서 체류하면서 처음 유엔난민기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큰 도움을 받아서 한국으로 올 수 있었죠. 하지만 그 때는 내가 만약 저 자리에 있었으면 속 시원하게 해냈겠다고 생각했어요. 난민들은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조급하니까요.” 긴박한 상황이었다. 도움을 청할 곳도 만날 수 있는 사람들도 유엔 직원들뿐 이었다. 세상으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였으나 참 더디게 열렸다. 정치외교학과로 진학을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지금이 좋아요"

한국으로 무사히 들어온 송희씨는 다른 탈북 친구들에 비해 금세 적응을 하고 공부에도 재미를 붙였다. “북한에서도 공부하는 걸 좋아했어요. 그렇지만 공부에만 집중할 수가 없었지요.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지금이 좋아요. 다양한 공부를 하면서 한국에 대해 배워가고 있어요.”

송희씨는 공부가 재미있다고 한다. 재미를 느끼며 한국을 알아가는 일은 어느새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다. “북한에 있을 때에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고민한 적이 없어요. 그 곳에서는 먹고사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보니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거든요. 그런데 한국에 와보니 나에 대한 고민이 없이는 살아 갈 수 없더라고요.”

 

 나를 알아가는 공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누구를 만나도 자신이 없었다. ‘북에서 넘어온 사람’ 이외에 스스로를 어떻게 소개해야할 지도 몰랐다. 탈북자라는 자격지심에 위축되기도 했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도전이 필요했다.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여전히 많다는 걸 알았다. 할 수 있는 건 작은 것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대학에 오자마자 시작한 일이 봉사 활동이었어요.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이제는 다시 전해주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어요.”

매주 토요일마다 장애아동을 만났다.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재미있게 놀았다.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 시간동안은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것 같았다. 3월부터는 지역아동센터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로 했다. 한국 아이들에 비해 유독 영어를 어려워하는 탈북어린이들을 위해 태국에서 배웠던 영어실력을 발휘하기로 한 것이다.

“특별히 탈북어린이들을 만나는 거라 떨리기도 하고 잘 하고 싶은 마음도 커요. 아이들이 학교생활을 재미있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한국 어린이들에 비해 좋지 못한 성적 때문에 한국생활에 적응하는 일이 힘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본격적인 여정은 이제부터다.

남한에 정착하던 초기에는 무엇이든지 다 필요했다. 그중에서도 지지하고 격려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때 우양을 만났다. “그땐 한국에서의 삶이 너무 막막해서 어머니가 어디선가 보신 우양재단 광고를 보고 전화를 하셨던 것 같아요.”

우양재단에는 탈북 청년가정을 지원하는 ‘심연’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는 탈북 청년가정이 한국사회에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과 더불어 한국청년 봉사자들과의 정기적인 만남을 통해 서로의 문화에 대해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도록 지원한다. 송희씨도 그 인연을 시작으로 올해 우양재단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데 장학생으로 뽑아주셔서 감사해요. 엄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즐거워요.”

운동을 좋아하는 송희씨는 올해 수영을 배울 생각이다. 작년보다 성적을 올리고 동아리 활동도 재미있게 해볼 것이다. 영어실력을 쌓아 교환학생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싶다. 무엇보다 연애에 관심이 간다. 새 학기를 시작하는 여느 학생들처럼 하고 싶은 것이 수두룩하다.

“주위에서 저를 응원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요. 멋지고 즐거운 대학생활로 보답해야죠. 또 저를 필요로 하는 친구들도 많으니 이번학기는 무척 바쁠거예요.”

도움의 손길은 늘 흐른다. 그 물결이 사회를 아름답게 만든다. 송희씨는 그 원리를 이미 터득한 듯 하다. 오늘도 진짜 자신을 찾기 위해 송희씨는 사람들 사이로 과감히 뛰어든다.


사는 이야기농촌라이프

 

2005년 가을결혼도 안 한 여자 혼자 시골로 내려왔다. 1980년에 지은 오래된 건물이 언덕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시골교회는 작고 낡았다마을엔 하루 종일 고요와 적막이 흘렀고 심심한 날들의 연속이다예배가 있는 수요일과 주일 외에는 바깥 출입이 없었다.

 

경남 함안군 작은 시골마을언덕 위 작은 교회는 휑뎅그렁했다대치교회 이성혜 목사(37)는 아직도 첫 부임했을 때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도시에서만 생활한 이 목사가 시골생활 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속은 따뜻하지만 겉은 까치름한 동네 사람들의 시선이 그랬고도시와 떨어져 있으면 왠지 도태되는 것 같은 불안함도 있었다그런 이 목사가 벌써 7년째 대치리에 머물고 있다.

 

겁나게 재밌어요주님은시골 인심이 그렇잖아요콩 한쪽 나눠먹어 보니까 알겠더라고요이게 행복이라는 걸.” 조금은 지루하고 심심할 것 같은 농촌라이프를 이제 체득한 모양이다.

  

목회 이야기하나님은 도시에서만 일하시나요?’

 

신학교 시절 조직이 잘 갖춰진 큰 교회에서 일 해 보기도 했다여자여서 못한다는 소리는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었고누구보다 열심히 사람들을 세워갔고 교회를 섬겼다인턴과정을 밟고 있었기 때문에 단독 목회는 생각해보지도 않았었다그것도 시골교회에서.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뜻하신 바가 있는 것 같아요제가 목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그 당시 힘든 일 때문에 도망치듯 이곳에 왔지만 누가 알겠어요. 7년 넘게 이곳에서 이렇게 목회를 할지.그러면서 알게 되더라고요하나님은 도시에서만 일하지시 않는다는 걸요.”

 

주일 대치교회 풍경은 이렇다. 11시 예배를 위해 사람들이 모인다어르신들 몇 명과 외국인 노동자들이 전부지만 어느 교회보다 밝고 활기차다. 3년 전부터 성경읽기제자훈련기도회 등을 했다먼저 터를 잡은 선배들은 어르신 한글학교어린이 공부방 등을 제안하며 할 수 있는 것을 해보라고 권했지만 이 목사는 달랐다. “교회마다 사명이 다르다고 생각해요다른 교회가 다 한다고 나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무턱대고 일을 벌였다가 가장 중요한 목회의 본질을 놓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물론 본인 능력이 없기도 한 게 더 큰 이유라며 겸손의 말을 한다.

 

대치교회 사람들

 

나는 술 먹고 담배도 먹고 다해무슨 세례고 집사야괜찮아하나님이 그런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그게 교횐가 

교회에 부인과 함께 오래 출석한 남자성도에게 어느 날 세례 받을 것을 권했다가 오히려 부끄러워 졌던 경험이다이 목사는 이런 교인들이 본인을 목사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처음에 마을 교회 목사로 혹은 여자 혼자의 몸으로 여러 가지 편견이 있었다거친 이 곳 사람들의 표현에 상처입기도 여러 번이었다어느 날 마을 어르신 한 분이 농협에서 주는 마을 달력이 있는데 그걸 집 앞에 놓고 가셨다그제야 마을에서 인정받았구나 생각이 들었다.

 

수년을 목사로 주일에 설교를 했지만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다곧 짐 싸들고 떠날 것 같던 여자로만 보였기 때문일까그러나 한 해 두 해 지나도 떠나지 않으니 마을사람들이 이 목사를 마을의 일원으로 알아줬다이 목사는 그제야 대치리 주민이 됐다.

올 초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힘들어 하는 교인으로 있었다좋을 때는 함께 하는 게 당연하지만 힘들 때 함께 하는 게 진짜라고 믿었다결국 그 교인은 예배에 안 나오기 시작했다목회를 하면서 개인적인 어려움이 없겠는가마는 이번만큼은 이 목사 개인에게도 힘든 시간이었다나중에야 교회를 떠난 교인을 만날 수 있었다.큰 말이 필요 없었다. ‘미안하다네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다.’고 말했다아니라고 믿었지만 권위적인 자리에 앉아있는 자신을 돌아봤다관계는 어느새 풀어져 있었다목회는 사람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목사 자신이 바뀌는 것임을 알게 됐다.

 

교인들의 아픔을 지켜보고 기다려주는 것이 답이더라고요프로그램이나 제한된 시간 속에서는 바뀌지 않아요.”

  

평범해도 괜찮아.’ 솔직 담백한 여성 목사

 

이 목사에게 궁극적인 꿈을 물었다있는 자리에서 목회자로 평범하게 살고 싶단다예전에는 개척자가 되고 싶기도누구보다 더 알려지고 싶기도 했다. “나라고 늘 좋겠는가교인들이 때로는 밉기도 하다. “ 솔직한 이 목사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평범한 일상에 계시는 하나님을 목회자로 뿐만 아니라 아내로 엄마로 만나고 싶단다굳이 이름 하자면 생명목회다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여자로서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다고 했다거창하지 않고 평범한 이야기지만 아직도 남성 중심의 기독교 목회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싶은 야무진 생각이다.

 

미자립이라는 말이 늘 불편하지만 빼 놓지 않고 물어봤다. “재정적으로는 늘 어려워요그러나 이 순간’ 만큼은 부족함이 없게 하시죠기적이 별건가요무던히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평범함이 기적이지 않나요.”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오늘도 대치교회는 조용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