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를전하는사람'에 해당되는 글 61건

  1. [닮고싶은청년들 vol.13] 텃밭선생님 오삼득 할아버지
  2. 2012년 상반기 자원봉사자 문화모임
  3. [닮고싶은쳥년들 vol.12] 워킹맘 후원자가 말하는, 거기 나눔있어요? 2

 

 

 

부웅~ 부부붕~!” 낡은 오토바이 소리가 우양빌딩 앞에 멈춘다. 십년은 더 탔을 법한 오래된 오토바이에서 노인 한 명이 내린다. 오삼득 할아버지(78). 오삼득 할아버지는 옥상 텃밭에 볼일이 있다. 건물에 들어오자마자 엘리베이터에 탄다. 6. 내려서도 한층은 걸어 올라가야 옥상이다. 몇 계단 올랐을 뿐인데 숨이 거칠다. 숨 고를 새 없이 고무호스를 들고 텃밭에 물을 뿌린다.

 

넓은 밭은 아니지만 이곳은 항상 일손이 필요하다. 텃밭을 가꾸는 자원봉사자는 많지만, 할아버지는 남다른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작물들에게 한바탕 물세례를 주고 나서야 한 숨 돌리는 할아버지. “이거 매일 아침 관리해주고 그래야 열매도 제대로 맺고 그러는데

텃밭 담당자에게 에둘러 잔소리다.

 

사실 할아버지는 우양 쌀 가족이다. 생활 형편이 썩 좋은 편이 아니다. 함께 사는 할머니는 몸이 많이 불편하다. 그간 폐지수집이 주 수입원이었다. 오토바이도 폐지를 나르기 위한 기구다. 무거운 종이더미와 박스를 나르며 생활비를 벌기도 벅찰텐데, 틈만 나면 우양 옥상텃밭에 올라와 본다.

 

요새는 몸이 안 좋아져서 종이 주우려 다니지도 못해. 허리도 고장 나고, 심장병이야 오래됐지. 그래도 우양에서 주는 쌀로 먹고는 살 수 있어. 다른 취미가 없으니 집에만 있어야 하잖아. 남들은 장기도 두고, 바둑도 두고 그러는데, 나는 그런 걸 하나도 안 배웠어. 여기 텃밭일이야 힘이 아니라 요령으로 하는 거잖아. 젊은사람들이 하기엔 힘들어도 오히려 나는 쉽게 하지.”

 

 

오삼득 할아버지는 젊어서부터 힘쓰는 일을 하셨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맨손으로 판 터널로 영동선 기찻길이 뚫렸고, 인근 광산에서도 오래 있었다. 빈 땅에서 농사일도 십년쯤하고, 서울근처에 와서는 목장을 했다. 나이가 더 들어서는 고물상도 했다. 한평생 무거운 짐을 나른 셈이다.

 

돈복이 없었나봐. 하는 일마다 잘 안되더라고. 젊어서 꿈이 농사한번 크~, 속편하게 지어보는 거였지. 지금 그래서 우양 옥상에도 올라와보고 그러나봐. 이렇게 작물 키워놓으면 동네 할머니들이 와서 재미삼아 따기도 하고, 먹고 그런다고 하더라고. 가끔 할머니들이 와서 밭을 망쳐놓고 가면 속상하기도 하는데, 그래도 이해해야지, 그런 소일거리라도 있어야지 노인들이.”

 

그는 옥상텃밭의 시작부터 함께였다. 텃밭에 심을 작물을 선택하는 데부터, 텃밭을 처음 가꾸는 청년 자원봉사자들의 교육도 할아버지 몫이다. “우양에서 도움을 받고 산지 10년이 넘었는데, 내가 더 늙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어. 벌써 몸이 많이 힘들어서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데, 여기 밭일이야, 내가 동네 사니까 한 번씩 들여다보는 정돈데, 도움이 될란가 모르겠네.”

 

 

나한테 쌀 가져다주는 사람은 이 동네 전파사 하는 사람이야. 동네에서 좋은 일도 많이 하고 그래. 사업은 크게 하지 않지만, 동네에 망가진 물건 보이면 고쳐주고 이러더라고. 좋은 사람이지. 우리 아들 키울 때도 저런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었는데. 우리식구들은 이제껏 살면서 경찰서한번 가본 적 없다니까. 근데 요새는 착하게 살아가지고는 밥도 못 먹고산다고 하더라고. 남들 속이고 산 사람들은 부자 되고 그렇다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쉬움도 있고...”

 

여느 노인들 이야기의 끝은 자식이야기다. 초등학교시절부터 시작해 자식 키워온 이야기를 늘어놓으신다. 들어보면 착하고 귀여운 꼬마이야긴데, 실제로 지금은 중년의 나이가 되었을 아들의 모습이다. 그래도 자신이 생각하는 바른 길로 일생을 걸어오고, 자신이 살아온 정직한 방법으로 자식을 키워낸 할아버지는 분명 닮고싶은 청년의 모습이다.

 

 

 

 

 

 

“심슨탕? 심슨탕이 머야?”

 

늘은 우양 쌀 가족과 함께 해주시는 자원봉사자 선생님들의 문화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왠 심슨이냐구요? 오늘 선생님들이과 함께 먹은 음식이 심슨탕이기 때문이죠. 심슨탕은 홍대에 위치한 부대찌개집이랍니다. 음식점에는 심슨을 의미하는지 노란 버터가 식탁에 놓여 있더군요. 자원봉사자 선생님들은 말씀하십니다. “여기 뭐 젊은 얘들이 오는 데 같은데?” “우양에서 간다니까 와보지. 이런 데가 다 있네.”

 

양에서는 이번 문화모임 장소로 젊음의 거리 홍대를 선택했답니다. 자원봉사자 선생님들 중에는 청년 선생님들도 있지만 아버지, 어머니뻘의 선생님들도 많이 계시기 때문에 실무자는 선생님들 입맛에 잘 맞으실지, 즐거워하실지 고민을 많이 했답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보다 항상 앞서가시는(?) 선생님들은 충분히 즐기시리라 믿고 과감하게 시도했답니다.

 

 

상 문화모임을 진행해보니 고민을 괜히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선생님들은 역시나 젊은 취향임을 이제야 알게 되었네요. 저희는 심슨탕을 먹고 근처 트릭아이 미술관에 들렀는데요.선생님들은 미술관을 관람하시며 그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시느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답니다. 그 사진들 한번 감상해 보실래요?

 

 

지폐들을 주우시는 선생님들 포즈의 센스가 넘치지 않나요? 확실히 미술관의 작품들은 위트가 넘쳤습니다. 하지만 선생님들의 유머있는 완벽 포즈가 작품보다 훨씬 돋보이네요. 선생님들에게 질 수 없어서 저희 실무자들도 센스작렬 포즈를 취해보았답니다.

 

(제 모습 영화 300에 나오는 스파르타 군인같지 않나요? 몸매가 아니라고요? 네 잘 알고 있습니다. ㅠㅠ)

 

실히 청년 우양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저희 자원봉사자 선생님들도 젊음이 넘치신답니다. 우양과 함께해주시며 어르신들을 돌봐주시는 모습에 저희들은 젊은이와 같은 열정과 활기를 보고 있답니다. 젊음을 느끼고 싶으신가요? 언제든 우양으로 찾아오세요. 젊은 활력을 언제든 느낄 수 있답니다.

 

양과 함께 하면 좋은 일이 생길수도 있어요. 위 사진처럼요? ^^

 

우양 쌀 가족 자원봉사 문의
돌봄팀 이해규 간사 tel : 02-333-2855

 

 

만남. 누구는 우주적 타이밍이라 했던가.

기부는 우양이 처음이었다. 우양과 오마이뉴스가 함께 기획하고 연재한 ‘인생을 말하다.’에서 유옥진 할머니 사연을 읽고 가슴이 아팠다. 그 당시 박선영씨는 막 기독교인이 되던 시기였다고 한다. 성경에 과부와 고아를 챙겨야 한다는 말씀이 가슴을 쳤다. 성경을 문자로만 이해하지 않았다.

“나중에 좋은 일 하면 된다고들 하는데, 그 나중이 언제가 될지 모르잖아요. 저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여러 사람을 도울 수 없어요. 그냥 유옥진 할머니를 도와드리고 싶었어요.”

박선영 후원자는 벌써 4년째 유옥진 할머니를 소소하게 챙기고 있다. “제가 먹을거 사면서 같이 하나 더 구입하는 거 뿐 이예요. 작은 거 잖아요. 무리하면 스트레스가 되잖아요. 그냥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하고 있어요.”

본인을 아주 평범한 가정주부이자, 워킹맘으로 소개하는 박선영 후원자를 만났다. 봄바람 가득한 오후 박선영 후원자의 집으로 찾아갔다. 집 현관문을 활짝 열어 들어오라 하니, 환영받는 다는 생각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했다. 박선영 후원자는 유옥진 할머니와의 ‘만남’ 을 우리 가족 외에 ‘다른 가족’ 을 생각하게 된 계기라고 표현했다. 아, 물론 박선영 후원자와 우양과의 ‘만남’도 평범하지는 않다.

우양도 당신이 특별했어요.

우양에게 박선영 후원자는 ‘지훈이 엄마’로 더 유명하다. 벌써 3학년이 된 지훈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우양과 첫 인연이 닿았다. 메일로 편지를 보내오고, 지훈이의 유치원 졸업사진을 보내오는 등 그야말로 우양과 제대로 ‘소통’하는 후원자였다. 매월 1만원을 본인의 이름으로 또 다른 1만원을 아들인 지훈이 이름으로 후원을 한지 올 해로 벌써 4년째다.

“후원금이 어떻게 쓰일지도 모르는데 하고 후원을 안 할 수도 있는데 저는 헌금과 다르지 않다고 봐요. 결국 내가 기부한 돈이 좋은 곳에 쓰일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부해요. 물론 중간에 그걸 잘 못 쓰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건 그 사람이 잘 못하는 거죠. 제 좋은 마음과 생각은 변하지 않는 거잖아요.”

그러면서도 농담으로 다른 여러 곳을 후원하는데 우양에서 오는 소식지는 꼭 챙겨본다는 박선영 후원자. 우양을 꼼꼼하게 모니터링 하고 있는 후원자가 분명하다.

 

유옥진 할머니를 통해서 본 세상

“어느 날 유옥진 할머니한테 소포가 왔어요. 그 때 제가 음식이고 생필품을 보냈을 땐데 제 주소를 기억하셨는지 큰 상자가 하나 온 거예요. 스타킹, 양말, 장갑, 간장...뭐 이런게 들어있는거에요. 저는 그분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의 답례를 하신다고 행각했어요.” 지금도 유옥진 할머니가 보내준 스타킹을 신고 있다며 발을 들어 보이며 웃어 보인다.

박선영 후원자는 본인을 사랑이 많고 박애정신이 투철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본인 역시 자기 가족이 소중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렇게 ‘남’에게 관심을 쏟을 수 있는 건 아들 지훈이 때문이다. 자식을 키우다보니 말만 할 수 없었다. ‘똑바로 살아라.’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라.’ 말만 하면서 본인은 안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유옥진 할머니와 벌써 4년째 ‘만나’오고 있다. 물론 아직 얼굴은 보지 않았지만 전화로 서로를 위로하고, 축하할 일이 있으면 축하하고 안부도 묻는다.

“워킹맘으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밸런스예요.”

수입 가구를 판매하고 컨설팅하는 일을 하는 박선영씨는 직장생활만 벌써 18년 째 다. 한 직장에서 그토록 오랜 시간을 다닐 수 있던 비결은 뭘까.

처음에는 가정일과 직장 일을 같이 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스스로 낙제 점수를 줄 정도로 말이다. 박선영씨는 무슨 일을 시작하면 ‘잘’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그녀가 직장 일을 계속하며 워킹맘으로 어느 정도 성공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균형이었다. ‘과연 둘 중 하나를 포기하면 행복하겠나?’ 그녀의 답은 ‘아니다’였다.

위기는 늘 찾아왔다. 첫 번째는 모유수유였다. 직장 여성이 모유수유를 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맘 편하게 안 할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박선영씨는 모유수유가 너무 좋았다. 아이와의 교감을 통해 본인도 위로받고, 아이도 위로하는 그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단다. 요즘도 아이 키우는 주위사람들에게 모유수유를 적극적으로 권하는 그녀다.

출산 휴가 3개월이 끝나갈 즈음 결정해야했다. 회사와 아이를 놓고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을 강요받을 때 그 허전함을 달랠 수 없었다. 모유를 끊고 회사에 돌아가는 것이 너무 슬펐다. 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회사에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화장실에서 유축해서 모유수유를 일 년 반이나 했다. 인생을 살면서 스스로에게 잘 했다고 칭찬할 만한 일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이 일은 돌아보면 꽤나 잘 한 일이라고 믿는다.

워킹맘으로서 두 번째 위기는 남편의 미국 파견 근무 때문에 온 가족이 미국으로 떠나야 하는 거였다. 회사에서 꼭 필요한 위치에 있는 터라 일을 쉽게 놓을 수는 없었다. 남편과 아이를 위해서는 함께 미국에 가는 게 맞았다. “생각해보니 회사를 다니면서 백프로 엄마가 돼 준적이 없더라고요. 나중에 내가 옆에 있고 싶어도 아들이 원치 않을 때가 올 거잖아요.” 그녀는 가정을 선택했다. 회사에서는 그녀에게 1년의 휴직을 주기로 했다.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일을 오래, 즐겁게 할 수 있었어요.”

나눔은 누군가에게 밥을 먹여주는 것

친정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박선영씨는 일요일마다 요양원으로 찾아가 아버지의 식사를 챙겨드린다. 그 일을 늘 지훈이와 함께 다녔다. 치매 어르신도 계신 요양원은 아이와 함께 다니기 좋은 곳은 아니었다. 갑자기 소리를 확 지르는 사람 때문에 지훈이가 놀랬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박선영씨는 지훈이를 데려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 별개의 인간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누구나 볼 수 있는 똑같은 세상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어느 날 유치원에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지훈이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사랑이란, 우리 엄마처럼 할아버지한테 밥을 먹여주는 거다.‘

박선영씨는 나눔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나눔도 힘이 없는 누군가에게 밥을 먹여주는 거 같아요. 습관적이고 때로는 의무감으로 하지만 자식은 그 의무적인 행동을 ‘사랑’이라고 배우더라고요. 지훈이는 아마도 제가 몸으로 보여주는 이것을 ‘나눔’이라고 배우고 있다고 생각해요.”

 

박선영 후원자는 일기를 쓴다. 얼마 전에 노트를 찾다가 10년 전에 썼던 일기를 발견했다. 10년 전엔 막연했던 일이었는데 지금은 다 이뤄졌더라. 그건 아마도 본인의 기대와 희망을 삶으로 차곡차곡 살아낸 결과가 아닐까. 이런 박선영 후원자 삶의 한 귀퉁이에 우양이 기억된다고 생각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