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를전하는사람/인터뷰'에 해당되는 글 50건

  1. [닮고싶은쳥년들 vol.12] 워킹맘 후원자가 말하는, 거기 나눔있어요? 2
  2. [닮고싶은청년 vol.11] 홍대부여고에 꽃미남 교사 있어요? 6
  3. [닮고싶은청년들 vol.10] 교회는 이루어진 공간이 아니라 이루어가는 공간 1

 

만남. 누구는 우주적 타이밍이라 했던가.

기부는 우양이 처음이었다. 우양과 오마이뉴스가 함께 기획하고 연재한 ‘인생을 말하다.’에서 유옥진 할머니 사연을 읽고 가슴이 아팠다. 그 당시 박선영씨는 막 기독교인이 되던 시기였다고 한다. 성경에 과부와 고아를 챙겨야 한다는 말씀이 가슴을 쳤다. 성경을 문자로만 이해하지 않았다.

“나중에 좋은 일 하면 된다고들 하는데, 그 나중이 언제가 될지 모르잖아요. 저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여러 사람을 도울 수 없어요. 그냥 유옥진 할머니를 도와드리고 싶었어요.”

박선영 후원자는 벌써 4년째 유옥진 할머니를 소소하게 챙기고 있다. “제가 먹을거 사면서 같이 하나 더 구입하는 거 뿐 이예요. 작은 거 잖아요. 무리하면 스트레스가 되잖아요. 그냥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하고 있어요.”

본인을 아주 평범한 가정주부이자, 워킹맘으로 소개하는 박선영 후원자를 만났다. 봄바람 가득한 오후 박선영 후원자의 집으로 찾아갔다. 집 현관문을 활짝 열어 들어오라 하니, 환영받는 다는 생각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했다. 박선영 후원자는 유옥진 할머니와의 ‘만남’ 을 우리 가족 외에 ‘다른 가족’ 을 생각하게 된 계기라고 표현했다. 아, 물론 박선영 후원자와 우양과의 ‘만남’도 평범하지는 않다.

우양도 당신이 특별했어요.

우양에게 박선영 후원자는 ‘지훈이 엄마’로 더 유명하다. 벌써 3학년이 된 지훈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우양과 첫 인연이 닿았다. 메일로 편지를 보내오고, 지훈이의 유치원 졸업사진을 보내오는 등 그야말로 우양과 제대로 ‘소통’하는 후원자였다. 매월 1만원을 본인의 이름으로 또 다른 1만원을 아들인 지훈이 이름으로 후원을 한지 올 해로 벌써 4년째다.

“후원금이 어떻게 쓰일지도 모르는데 하고 후원을 안 할 수도 있는데 저는 헌금과 다르지 않다고 봐요. 결국 내가 기부한 돈이 좋은 곳에 쓰일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부해요. 물론 중간에 그걸 잘 못 쓰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건 그 사람이 잘 못하는 거죠. 제 좋은 마음과 생각은 변하지 않는 거잖아요.”

그러면서도 농담으로 다른 여러 곳을 후원하는데 우양에서 오는 소식지는 꼭 챙겨본다는 박선영 후원자. 우양을 꼼꼼하게 모니터링 하고 있는 후원자가 분명하다.

 

유옥진 할머니를 통해서 본 세상

“어느 날 유옥진 할머니한테 소포가 왔어요. 그 때 제가 음식이고 생필품을 보냈을 땐데 제 주소를 기억하셨는지 큰 상자가 하나 온 거예요. 스타킹, 양말, 장갑, 간장...뭐 이런게 들어있는거에요. 저는 그분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의 답례를 하신다고 행각했어요.” 지금도 유옥진 할머니가 보내준 스타킹을 신고 있다며 발을 들어 보이며 웃어 보인다.

박선영 후원자는 본인을 사랑이 많고 박애정신이 투철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본인 역시 자기 가족이 소중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렇게 ‘남’에게 관심을 쏟을 수 있는 건 아들 지훈이 때문이다. 자식을 키우다보니 말만 할 수 없었다. ‘똑바로 살아라.’ ‘어려운 사람을 도와줘라.’ 말만 하면서 본인은 안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유옥진 할머니와 벌써 4년째 ‘만나’오고 있다. 물론 아직 얼굴은 보지 않았지만 전화로 서로를 위로하고, 축하할 일이 있으면 축하하고 안부도 묻는다.

“워킹맘으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밸런스예요.”

수입 가구를 판매하고 컨설팅하는 일을 하는 박선영씨는 직장생활만 벌써 18년 째 다. 한 직장에서 그토록 오랜 시간을 다닐 수 있던 비결은 뭘까.

처음에는 가정일과 직장 일을 같이 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스스로 낙제 점수를 줄 정도로 말이다. 박선영씨는 무슨 일을 시작하면 ‘잘’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그녀가 직장 일을 계속하며 워킹맘으로 어느 정도 성공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균형이었다. ‘과연 둘 중 하나를 포기하면 행복하겠나?’ 그녀의 답은 ‘아니다’였다.

위기는 늘 찾아왔다. 첫 번째는 모유수유였다. 직장 여성이 모유수유를 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맘 편하게 안 할 수도 있는 노릇이지만, 박선영씨는 모유수유가 너무 좋았다. 아이와의 교감을 통해 본인도 위로받고, 아이도 위로하는 그 느낌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단다. 요즘도 아이 키우는 주위사람들에게 모유수유를 적극적으로 권하는 그녀다.

출산 휴가 3개월이 끝나갈 즈음 결정해야했다. 회사와 아이를 놓고 이것이냐 저것이냐 선택을 강요받을 때 그 허전함을 달랠 수 없었다. 모유를 끊고 회사에 돌아가는 것이 너무 슬펐다. 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회사에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화장실에서 유축해서 모유수유를 일 년 반이나 했다. 인생을 살면서 스스로에게 잘 했다고 칭찬할 만한 일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이 일은 돌아보면 꽤나 잘 한 일이라고 믿는다.

워킹맘으로서 두 번째 위기는 남편의 미국 파견 근무 때문에 온 가족이 미국으로 떠나야 하는 거였다. 회사에서 꼭 필요한 위치에 있는 터라 일을 쉽게 놓을 수는 없었다. 남편과 아이를 위해서는 함께 미국에 가는 게 맞았다. “생각해보니 회사를 다니면서 백프로 엄마가 돼 준적이 없더라고요. 나중에 내가 옆에 있고 싶어도 아들이 원치 않을 때가 올 거잖아요.” 그녀는 가정을 선택했다. 회사에서는 그녀에게 1년의 휴직을 주기로 했다.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일을 오래, 즐겁게 할 수 있었어요.”

나눔은 누군가에게 밥을 먹여주는 것

친정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박선영씨는 일요일마다 요양원으로 찾아가 아버지의 식사를 챙겨드린다. 그 일을 늘 지훈이와 함께 다녔다. 치매 어르신도 계신 요양원은 아이와 함께 다니기 좋은 곳은 아니었다. 갑자기 소리를 확 지르는 사람 때문에 지훈이가 놀랬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박선영씨는 지훈이를 데려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 별개의 인간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누구나 볼 수 있는 똑같은 세상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어느 날 유치원에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지훈이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사랑이란, 우리 엄마처럼 할아버지한테 밥을 먹여주는 거다.‘

박선영씨는 나눔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나눔도 힘이 없는 누군가에게 밥을 먹여주는 거 같아요. 습관적이고 때로는 의무감으로 하지만 자식은 그 의무적인 행동을 ‘사랑’이라고 배우더라고요. 지훈이는 아마도 제가 몸으로 보여주는 이것을 ‘나눔’이라고 배우고 있다고 생각해요.”

 

박선영 후원자는 일기를 쓴다. 얼마 전에 노트를 찾다가 10년 전에 썼던 일기를 발견했다. 10년 전엔 막연했던 일이었는데 지금은 다 이뤄졌더라. 그건 아마도 본인의 기대와 희망을 삶으로 차곡차곡 살아낸 결과가 아닐까. 이런 박선영 후원자 삶의 한 귀퉁이에 우양이 기억된다고 생각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를 처음 만난 건 진달래가 붉게 익어가는 지난 4월 초 우양 졸업생 모임에서다. 홍대 안 작은 식당에서 진행된 졸업생 모임은 저녁시간에 진행 된 터라 다들 퇴근하고 오느라 7시 반이 넘어서야 사람들이 제법 모이기 시작했다. 그런 모임에 일찍 온 몇 사람은 늘 눈에 띄게 마련이다. 그 역시 아주 일찍 도착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인터뷰를 위해 청년팀 담당자를 통해 처음 인사를 나눴다. 나중에 그가 졸업생 모임에 빨리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됐다. 그는 홍대부여고 교사였다. 그런 그를 벚꽃 흐드러지게 핀 오후 교정에서 다시 만났다. 수업이 끝나고 청소하고 돌아오는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좋다고 낄낄댄다. 치마를 입고가기 다행이다.

 

선생, 소성욱. 나는 감성적인 교사다

수시녀를 아십니까. 수요일에 시 읽어주는 여자의 줄임말이다. 소성욱(만 29세)씨가 담임으로 있는 홍대부여고 3학년 3반은 독특한 학급이다. 1인 1역할이라고 들어봤는가. 이 학급에서는 모두가 하나씩의 자기 역할을 가지고 있다. 수시녀도 그 일환으로 생겨났다. 세 명의 학생이 수요일 아침 조회시간에 본인이 준비해온 시를 한 편씩 읽는다. 물론 자발적인 일이다. 학생들이 화분을 가지고 오면 화분이름 옆에 학생이름을 붙어 이름표를 달아준다. 이를테면 ‘진달래 박은지’ 식이다. “처음에는 제가 화분 몇 개를 반에 갖다 놓아요. 아이들한테는 가지고 오면 이름을 붙여준다 말하죠. 며칠이 지나면 진짜 아이들이 화분을 가져오는 거예요. 전 약속대로 이름을 붙어주죠. 도시아이들에게 자신이 무언가를 스스로 가꾸는 일을 놀라운가 봐요.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이런 아이디어는 모두 소성욱씨 머리에서 나왔다. 여고에서 인기 끌려면 이 정도는 기본이란 말인가. 인기 꽤나 있어 보이는 교사다. 

 

우양과의 인연은 간단했다. 복학 후 과 게시판에서 공고를 봤다. 그 당시 친구들과 야심차게 첫 해외여행을 준비했던 터였다.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로 떠나기 전 날 우양재단 면접에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연히 면접에 갔다. 그 때 인생 첫 비행기를 놓쳐서 아직까지 비행기를 못 타봤단다.

학생 소성욱 씨는 선생이 되고 싶었다. 공부를 더 해서 교수가 될지 교사가 될지가 고민이었다. 그는 그의 삶을 결정 하게 했던 한 권의 책을 소개했다. 바로 막스베버의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다. 그는 이 책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뒤쳐진 사람이 자기를 앞질러 갈 때 아무런 마음의 동요 없이 지켜봐야 한다.’ 라는 말에 그의 진로를 결정했다.

석사를 마치고 교수에 대한 꿈을 놓았다. 그렇다고 아예 꿈이 없는 건 아니다. 그는 기회가 되면 EBS강사도 하고 싶단다. 작고 소박한 기회들을 만들어 이루어 가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꿈을 이루어 가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선 판서학원부터 등록할 일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악필이란다.)

인생의 질척한 땅을 굳은 땅으로

이제 서른 살. 졸업 후 바로 교직생활을 시작해 벌써 5년차 선생인 소성욱씨는 운동을 좋아하는 보통남자다. 대학 시절 축구부를 할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고 지금은 우양 졸업생과 재학생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우양FC에서 매달 축구를 한다. 저녁마다 조깅을 해서 무려 6kg을 감량한 그는 훤칠한 키에 다부진 몸매로 남자다움을 과시한다. 여고에서 교사생활 하려며 이정도 자기관리는 필수라면 농담도 던진다. 이런 그가 이렇게 운동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따로 있다.

5살 때 화상을 입어 죽다 살아났다. 아직도 왼쪽 팔과 다리에 화상의 흉터가 있다. 어릴 때 당한 ‘사고’ 는 말 그대로 누구의 책임도 아닌 그냥 사고였다. 하지만 화상은 그의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에도 상처를 남겼다. 그 당시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본인의 치료비로 많은 돈이 들어가는걸 보고 소성욱씨는 더욱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에게도 질 수 없었고 대충 할 수도 없었다.

대학에 입학할 때 그는 사회교육과만 지원했다. 하고 싶은 것은 분명했다. 서울대 사회교육과에 합격한 그는 누구보다 선생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만 서면 눈 밑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숫기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우연한 계기로 교내 대학생활문화원에서 1:1 상담을 받았고 그 시간을 통해서 그는 스스로 ‘건강해졌다’ 고 말한다. 화상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심리적으로 그를 위축되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런 후 교생실습을 나갔는데 학생들 앞에서는 하나도 떨리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교사가 체질임을 직감했다.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함께 찾아주고, 행복해질 수 있는 일는 돕는 교사가 되고 싶어요.” 그는 아이들이 스스로 느끼기 전까지 교사의 훈육은 별로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지지와 격려가 가장 중요하단다.

 

사회교사로서 그는 아이들에게 매번 당부한다. “누굴 지지하던지 상관없다. 단지 정치에 절대 무관심해지지 마라.” 최근 총선을 치르면서 졸업한 아이들에게 카톡으로 투표를 독려할 정도니 아이들의 대한 사랑, 직업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회생활의 선배이자 교사로서 지금의 대학생들에게 한 마디 해달라고 했다. 그는 주저 없이 말한다. “대학생 때 최대한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해요. 분야를 가리지 말고요. 책, 사회참여, 봉사활동, 연애 등등 많잖아요.”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지 나중에 자기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에 내공이 생기고 그래야 깊이 있는 사람이 되지 않겠냐며 오히려 되묻는다. 그리고 덧붙인다. 1,2학년 때부터 고시공부 하지 말아야 한다. 이건 본인에게도 불행한 일이고 사회도 불행한 일이다. 만약에 그렇게 공부해서 판사가 됐는데 아기 분유 살 돈이 없어 분유를 훔친 사람을 판결할 때 법전에 있는 판결만 하지 않겠냐는 이유에서다.

“취업에만 목매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지름길처럼 보이지만 결국 둘러가는 길이잖아요.” 누가 그랬다. 삼십대의 성숙의 척도는 ‘유연성’이라고. 이제 딱 삼십인 소성욱씨에게서 여느 또래와 같은 경직된 모습은 찾아볼 수 가 없다. 그가 사회생활을 빨리 시작해서, 엘리트 코스에서 전향한 교사이기 때문에가 그 이유가 아니라 진솔한 말 속에서 묻어나는 여유가 그를 성숙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다.

경남 거창 출신으로 아직도 사투리가 고쳐지지 않아 수업시간에 말만 하면 아이들이 낄낄 웃어서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나중에 지나고 보니 이것도 나름 아이들을 집중시키는 본인만의 장점임을 알게됐단다. 시골 총각의 서울 교사 생활기는 두고두고 들어도 재미있는 이야기다.

 


 

그와의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입에 맴돌았다. 나이 받침에 ‘니은’자가 들어가면 가져갈 것은 가져가고 포기해야 한다는 김광석의 노랫말에 절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나이 서른. 문득 이제 막 시작한 소성욱씨의 서른이 그러기를 바래본다.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한 사람을 만나고 사귀고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단지 시간의 문제라고 하기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련, 유혹, 고통 그리고 기쁨은 늘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문제기 때문이다. 그를 만난 장소 역시 남다르다. 100교회 목회자 성지순례 여정 중에 만났다. 이집트, 이스라엘 그리고 비로소 요르단에 넘어와서야 그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눴다. 시간은 넉넉하지 않았다. 장소는 요란했고 어두웠다. 그러나 그와의 대화는 진솔했다. 우린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누구를 이해한다는 것은 장소와 분위기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삶의 정오에서야 비로소 이해된다.’ 는 것을 말이다.

 

나를 이근원이라 불러주오.

인간이 삶의 의문을 제기할 때는 언제인가. 바로 높이와 풍부함을 얻고자 할 때다. 삶은 높아지고자 할 때 분명 기존의 뭔가와 싸운다. 이근원씨 역시 그렇다. 10년 전 이집트 피라미드를 혼자 여행 할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까지 했다. 함께 손잡고 피라미드 꼭대기에 올라갔던 이야기는 성지순례 내내 회자되었다. 그런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3년 전 아내가 뇌종양 선고를 받은 것이다. 큰 병원비를 감당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 부부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때 우양재단을 통해 얼마만큼의 병원비를 지원받았다. 이근원씨는 이때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하심을 느꼈다고 한다.

 

성지순례 기간 내내 여느 목사님들 과는 달리 혼자 사색에 잠겨있는 이 목사는 흔한 디지털 카메라 하나 손에 들지 않았다. 처음 오는 여행지가 아니어서인지 남들과 다른 여유로움도 묻어난다. 100여 명의 대규모 무리. 순례의 여정 속에 남들과 다른 옷차림과 분위기로 궁금증을 자아냈던 그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구속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그에게서 노마드적인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니 호기심은 증폭됐다.

 

다같이 놀자 양평교회에서

경남 거창, 양평마을. 할머니 7, 아이들 조금, 중고등부 조금. 매 주일 12~15명 정도가 빙 둘러 앉아 예배를 드린다. 양평교회에는 강대상이 없다. 예배 형식이야 당연히 있지만 이목사가 설교하는 도중에 누군가 말을 하면 순간 딴 길로 새기 일수다. 그게 뭐 그렇게 큰 문제겠는가. 그저 방바닥에 둘러앉아 이야기 하는 자체가 예배인 것을 이 교인들은 잘 아는 것 같다.

 

감리교 수련목 이후 목사안수를 받고 첫 사역지인 양평교회. 벌써 9년째 한 교회에 머물며 살고있는 그에게 목회는 어떤 의미일까. 그는 한 순간도 어려웠던 적이 없다. 순진한 할머니들과 노는 것이 재미있다. 할머니들은 매일 싸우지만 말리지 않는다. 교회는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나. 양평교회 교인들은 평생 처음 교회에 나온 분들이 대부분이다. 어떤 어르신은 십자가에 합장하고 들어오신다. 교회가 어떤 곳인지 모르는 분들이다. 그래서 더 재미있다. 그게 문제인가. “이분들은 단순히 성도가 아니예요. 식구죠.” 그의 말이다. 아래채 예배당에서 예배가 끝나면 윗채에 올라와 밥을 먹고 차를 마신다. “예배는 결국 밥상으로 끝나야 해요.” 이제야 성도가 아니라 식구라는 말이 이해가 된다.

 

교회는 교회기만하고 세상은 세상이기만 하다.”

이 목사는 소통의 중요함을 강조했다. 매년 성탄절 등 절기 행사 때마다 나름의 주제를 정해 마을 축제로 진행한다. 재작년에 ‘Fun Fun한 크리스마스에 이어 작년 크리스마에스는 이웃에게 말을 걸다.’ 는 주제로 마을 회관에서 중고등부 아이들이 공연도 하고 함께 떡국도 끓여 먹었다. 분위기는 물어볼 것도 없이 좋았다. 교회의 분명한 역할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행사였다.

 

어쩌면 일어날지 몰라, 기적

그는 지금 작은 공간을 만들었다. 마을 어르신이 무상으로 땅을 빌려줬고, 또 어떤 누군가가 건물을 빌려줬다. 이들 누구도 주인이라고 우기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도 주인이 아닌 공간이 생겼다. 그는 그곳에 이름을 사람 책 도서관이라고 붙였다. ‘나는 런던에서 사람 책을 읽는다.’란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도서관이라 하면 으레 책을 빌리기 마련인데 이 곳에서는 책 대신 사람을 빌려 읽는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은 여행 책이 되어 이야기를 들려준다. 주목 받지 않는 소방관이 미혼모가 동성애자가 스스로 책이 되어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다. ‘리빙 라이브러리바로 그가 꿈꾸는 살아있는 도서관이다. “책을 읽는 건 사실 대화하는 거예요.” 아직은 미비하지만 이런 공간이 존재한다는 생각만으로도 흥분된다.  

 

교회는 이루어진 공간이 아니라 이루어가는 공간이예요.”  

교인이 아니더라도 주위에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을 초대하고 이야기한다면 어떨까. 공동체라고 꼭 한 공간에 모여 살아야 하는가. 이목사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그게 바로 공동체가 아니냐고 반문한다. 교회, 마을이 아니라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공동체. 고정된 틀 속에서 교회는 이래야 한다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본질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고립된 삶에서 함께하는 삶으로.  

 

잠시 쉬어가는 여행, 성지순례

성지순례의 참여한 사람 대부분이 목사이고 남자인지라 약간의 편견을 가지고 물었다. 성지순례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는 같은 형편의 사람들끼리 성경에 있는 성지를 돌아보고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 하는 것 만으로도 의미 있다고 했다.

그는 기억에 남는 성지로 이집트 모카탐 언덕에 오를 때를 꼽았다. 모태신앙으로 평범하고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해왔다. 어릴 때 아침마다 가정예배를 드렸고 청소년기에는 교회에 대한 반항심도 있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어쩌다신학생이 됐다고 한다. 그런 그가 모카탐을 오르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단단함에 놀랐다. 무슬림으로부터의 조롱 속에서도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는 그들을 보니 가슴이 짠해왔다. 

 

처음에는 그저 말랑하게 보였던 그였는데 대화를 하고 있자니 말랑함 속에 단단함이 느껴진다. 이유를 찾았다. 그는 인생의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아버지를 꼽았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억척스럽게 일 하시는 아버지는 궂은 일 마다하지 않으시는 단단한 분이었다. 아버지의 신앙은 인생 못지 않게 고집 있는 단단함이 있었다. 이 목사는 그런 그의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을까. “우리 아버지는 단단하신 분이예요.” 라는 말이 마치 우리 하나님은 단단하신 분이예요.” 처럼 들린다.

 

한번은 아내가 물었다. 당신이 원하는 목회는 뭐냐고. 한참을 고민했다. 나는 무엇을 보며 달려가는가. 여전히 고민 중이다. 그는 정의와 평화, 화해 그리고 용서에 관심이 있다고 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틀린 것인데 지적하고 바로잡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솔직한 마음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미 그는 어쩌면 많은 것을 용서하고 이해하며 사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Happy virus, 양평교회. 그가 현재 운영하는 블로그 이름이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간은 아니다. 현재의 삶을 차곡차곡 쌓아 두는 공간이다. 삶이 무료해질 때 경남 거창 양평교회에 들려보시라. 특별하지는 않지만 남다른 삶의 탈출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른 글 보러가기

[닮고 싶은 청년 vol.1] 신나는 도서관을 꿈꾸는 이정민 씨

[닮고 싶은 청년 vol.2] 농사짓는 사모 이선주 씨

[닮고 싶은 청년 vol.3] 어탕국수는 사랑을 싣고

[닮고 싶은 청년 vol.4] 2011년 길 위에선 우양청년들

[닮고 싶은 청년 vol.5] 꿈을크게 가진다고 돈드는거 아니잖아요

[닮고 싶은 청년 vol.6] 봉사의 기쁨을 맛보고 있습니다

[닮고 싶은 청년 vol.7] 누구나 행복한 꿈이 필요해 

[닮고 싶은 청년 vol.8] '자원봉사자는 1만큼의 사랑을 주고, 무한대의 사랑을 받는 거에요  

[닮고싶은청년 vol.9]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