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를전하는사람/인터뷰'에 해당되는 글 50건

  1. [닮고싶은 청년 vol.36]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이야기를 편견 없이 풀어내고 싶어요.” - 청년, 최장현
  2. [닮고싶은 청년 vol.35]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노래를 부릅니다
  3. [닮고싶은 청년 vol.34] 농활이야말로 힐링캠프죠. - 농어촌섬김 장학생 우예품

 

 

강사라기 보단 이야기하는 사람이죠. 북한에서의 경험을 매개로 사람살이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최장현씨(30)는 지난해 우양평화강사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정식으로 평화강사가 되었다. 하지만 강의를 하기 시작한 건 이미 수년 전이다. 가장 많이 이야기하게 되는 주제는 북한에서의 경험이다.

아무래도 북한의 생활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궁금해 하죠.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북한이야기를 편견 없이 풀어내고 싶었어요.”

궁금해 하는 사람들은 많았고 정보는 부족했다. 근거 없는 말들이 진실처럼 전해지기도 했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순 없지만 적어도 겪은 것들은 바르게 전하고 싶었다.

대한민국의 언론에서도 북한이야기를 꾸준히 하죠. 오히려 그 이야기들이 북한에 대한 편견을 만들어 내고 있어요. 북한에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 보다 훨씬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삶을 살고 있거든요.”

그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사람살이에 대해서다. 북한이라는 이름아래 통칭되는 것 이아니라 북한에 살고 있는 개인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북한의 주민들은 착하고 통치자들은 나쁘다라는 생각이 대한민국사람들이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편견인 것 같아요. 이렇게 이분법적인 시선으로 북한을 이해할 수는 없어요. 그들은 그 체제 안에서 자연스런 자신들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니까요. 그들이 자라온 문화적 토양을 알아야 조금이나마 그들을 이해할 수 있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강의에 대한 열정이 생겼다.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강의를 홍보하였다. 주변 대학교에는 직접 만든 포스터를 붙이며 강의신청을 받았다. 비영리단체나 세미나에서 초청을 받기도하고 대학생들 모임에서 또 기업에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 우양재단 평화강사가 되고 난 후에는 초, , 고등학교에서도 강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발로 뛰며 시작한 강의가 벌써 35회가 넘었다.

 

지난 여름방학에도 강의가 많았어요. 강의를 가거나 준비하는 시간 외에는 주로 책을 읽어요.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는 면에서 방학은 나만의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는 시간이죠.”

방학에는 한 달에 스물다섯권 이상 책을 읽는다. 북한에서 대한민국으로 와 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점이다.

때로는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어떤 학교를 다니는지, 고향이 어디인지 이야기하는 것 보다. 내가 그 동안 읽은 책 목록을 이야기 하는 것이 나를 더 정확히 소개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책 목록을 보면 내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오늘까지 살아왔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북한에서도 책을 읽는 것이 가장 좋았다. 북한에서 아버지는 가끔씩 중국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중국에서 구해온 오래된 대한민국 책을 읽으며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한민국에서의 삶을 꿈꾸게 된 첫 순간이었다.

 

 

 

어머니는 북한에서 학교 선생님이셨어요. 그래서 저는 다른 친구들보다 한글을 일찍 배웠어요. 보통 북한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글자를 배우기 시작 하거든요. 저는 5살인가부터 한글을 읽을 수 있었는데 한글을 읽고 나니까 유치원에 가기 싫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니가 출근하는 학교에 1년 동안 같이 다녔어요. 어머니가 일하는 동안 저는 하루 종일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죠. 그때부터 책을 좋아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풍부한 독서이력은 그가 북한은 객관화해서 바라보는데 도움을 주었다. 덕분에 그의 강의는 단순히 옛날이야기를 전해주거나 탈북과정에서 고생했던 경험을 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북한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 또한 납득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풀어간다.

일방적으로 북한의 특정 사실에 대해 전하는 일은 큰 의미가 없어요. ‘네가 알고 있는 사실은 편견이야, 지금 내가 말해주는 것이 진실이야라는 식으로 강의를 진행하면 청중이 잠깐은 제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진실로 받아들일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건 언론이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금세 대체될 가능성이 높아요.”

그래서인지 그는 여러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일방향 강의보다 소수의 인원과 함께하는 쌍방향 강의를 선호한다. 사회현상에 대한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며 북한 사회를 자연스럽게 이해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제가 알고 있는 북한지식이라는 것도 시대성을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북한사회도 늘 급변하는지라 제가 전할 수 있는 지식은 단지 역사적 지식일 수 있죠. 그래서 저는 청중들이 북한사회의 어떤 현상에 숨어 있는 의미를 파악해서 북한을 더 잘 이해하도록 만들고 싶어요.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도록 하는 거죠. 이게 제 강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에요.”

 

                                                           

 

치열하게 진로가 고민되는 대학교 4학년. 전업강사를 목표로 잡았다. 운동, 독서와 더불어 매일 거르지 않는 것이 발음과 목소리 교정이다. 좋은 강사가 되기 위한 꾸준한 노력이다.

단순히 많이 아는 사람이 좋은 강사는 아닌 것 같아요. 좋은 강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하거든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감정들을 끌어내 지식과 같이 버무릴 수 있는 강의를 하고 싶어요.”

학생이자 동시에 강사이다. 이제 겨우 강사로 한 걸음 내딛었지만 앞으로 공부하고 준비해야할 일들이 더 많다.

앞으로 할 공부가 너무 많아요. 강사뿐만 아니라 넒은 의미에서 인문학자가 되고 싶거든요. 계속 공부하고 싶고 또 그럴 수 있다는 건 참 멋진 일이예요.”

 


 길가는밴드 리더 장현호 

 


길가다 볼 수 있는 흔한 인상이라 이름을 길가는 밴드라고 지었을까? 밴드의 리더 장현호 씨(36) ‘사람 좋아 보인다’는 말이 어울리는 수더분한 외모의 소유자다. 그렇지만 기타를 둘러멘 그의 모습은 다르다. 그는 거리에서 노래하는 사람이다. 그가 내뿜는 에너지는 길바닥을 크게 울린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 길바닥이 다른 어떤 곳보다 노래가 필요한 곳이라는 점이다.

 

다행히 우양재단의 사업현장도 그 길 위에 있었고, 운 좋게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탈북청년들을 격려하는 행사에서 들린 그의 노래는 평화를 말하고 있었다.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의 평화가 아닌, DMZ에서 다함께 춤을 추자는 올찬 평화였다. 울림이 있는 노래였다.

 

원래 그는 노래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연주자에 가까웠다. 군악대에서 드럼을 쳤고, 학교에서 베이스기타를 전공했다.‘부흥한국’이라는 팀에서 연주를 했고, 몇몇 밴드도 거쳤다.그러면서 직접 노래를 하고싶어졌다. 부흥한국에서 활동하며 통일에 대한 이슈를 접하고, 탈북민들을 만나면서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노래를 부릅니다

 

‘모든 사람의 입에 곡식을 공평하게 넣어주는 것이 평화. 평화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쌀을 팔아 그곳으로 달려갔지만 부끄러워 문밖에 두고 나왔는데 밥을 지어주고 싶구나.아이와 어른이 모두 한상에 모여 웃고 떠들며 둘러앉아 하얀 쌀밥을 나누면서 하는 말 이제 우린 한 가족이구나’ 


길가는 밴드의 대표곡 ‘쌀의 노래’의 가사가 이렇다. 그는 평화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누군가 제게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전 바로 ‘가사’라고 말합니다. 전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고, 그걸 그나마 효과적으로 표현 할 수 있는 게 노래거든요. 노래라는 방식으로 제 이야기를 하는 거죠. 노래를 만드는 과정도 같은 맥락이에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머릿속에서 계속 되뇌는 거예요. 그러다가 기타를 잡고 운율을 만들고 이야기를 가사로 얹는 겁니다”

 

선율이나 리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메시지라는 말이다. 그래서 주변으로부터 노래가 조금 길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포기할 수 없어 노래에 메시지를 조금은 꾸겨 넣은 느낌이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다.

 


요즘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말은요

“지금 만들고 싶은 노래의 제목은 ‘강 건너 불 보듯‘이에요. 얼마 전에 북한과 중국이 마주하는 조중접경 지역에 다녀왔어요. ‘장백현’이라는 곳에 갔는데 강 건너에 북한 사람들이 사는 모습들이 훤히 내다보이더라고요. 북한사람들을 직접 본건 저에게 충격이었어요. 거기도 사람 사는 동네인데, 그곳을 신기하게 느끼는 저를 보면서 그쪽 주민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어요. 망원경으로 그들을 보는 행동도 불편했고요.

 

소리 지르면 다 들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애써 모른척하고 농사짓고, 빨래하는 모습에 마음이 울컥했다. 같은 민족으로 서로의 존재는 의식하지만 대화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보면서 깨달은 게 있다. 진짜 평화는 직접만나서 이야기하고, 만질 수 있고, 서로 밥을 떠먹여 줄 수 있는 관계라는 거다. 이런 마음에 노래가 하고싶어졌다. 남과 북의 방대한 이야기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로 풀어내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이런 이슈가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북한 쪽을 쳐다보는데 마을도 보고, 소가 풀 뜯는 것도 보고, 농사짓는 사람들도 봤어요. 그러면서 저희 부모님 고향이 떠올랐어요. 저희 아버지가 섬진강가에 사셨고, 어머니는 강 건너편에 사셨거든요. 아버지가 강을 건너와 선을 보시고 어머니와 결혼하시고 제가 태어났는데요. 북한의 풍경과 부모님의 풍경이 오버랩되면서 감정이 북받쳐 왔어요”

 


노래하는 사람? 운동가?

 

그의 순수한 마음은 가끔 오해도 낳는다. 교회에서도 노래를 하는 그에게 가끔은 노래하는 사람인지, 운동가인지 질문하는 이도 있다.

 

“저는 밴드 U2를 좋아합니다. U2에는 기독교인인 멤버들이 있는데 그들을 팀으로 묶어준 기독교단체에서 음악 때문에 배척을 당한 적도 있다고 해요.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이 부르는 노래가 바로 예배하는 거랑 다름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지금의 세계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밴드가 된 거죠. 저희 노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분들도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싸이와 김장훈의 음악 중 무엇이 더 좋냐고 물어보면 전 김장훈을 선택할 거예요. 싸이의 음악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김장훈이 음악외적이 모습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들이 좋거든요. 사람들은 김장훈을 음악보다는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게 아니냐고 평가하기도 하지만요”

 

그는 길 위의 노래와 교회 내 노래가 공존할 수 있다고 했다. 각각의 다른 장소에서 같은 노래를 불렀던 경험도 있었고, 메시지가 통하는 부분도 분명 있다는 거다. 양쪽 다 포기할 수 없는 그는 기독교음악 앨범과 길가는 밴드 앨범을 동시에 준비하고 있다.

 


“길 위에서 노래를 부를겁니다”

 

“사실 이런 이유로 적대감을 드러낸 사람이 많진 않았어요. 노래이기 때문에 허용되는 게 많아요. 노래는 좌우를 다 넘나들잖아요. 어렸을 적 많이 불렀던 작은 연못(김민기) 같은 노래의 가사를 다시보니 엄청난 임팩트가 있는 노래더라고요. 이런 노래를 만들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그는 통일 이슈 외에도 관심사가 다양하다. 그리고 노래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억울한 노동자들의 곁을 지키러, 사고의 비참한 희생자들을 위로하러, 탈북자들의 조그만 외침에 힘을 보태려 전국을 누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그들을 추모하는 노래도 만들어 불렀다.

 

“제 꿈은요. 제가 늙어서 노래를 부를 수 없는 날이 올 때까지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만약 그사이에 통일이 된다면 통일을 기대하면서 부른 노래가 통일 전의 과거를 회상하는 노래로 바뀌겠죠. 그렇게 되면 세계평화에 집중한 노래를 불러야할지도요 하하하.

 

 

 

 

 

 

농어촌 목회에 관심 가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농촌엔 답이 없다고 생각했죠. 그러던 중 만난 우양은 농어촌에서 목회를 하는 우리 가정과 교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주었어요. 우양과의 만남이 우리가족에겐 위로였어요.”

 

우양의 여름은 농촌봉사활동으로 시작한다. 여름방학을 맞은 청년들은 농어촌에 있는 작은교회을 기점으로 농촌봉사활동을 펼친다. 우양청년들은 단순히 농사에 일손을 보태는 것뿐만 아니라 마을주민들을 위한 문화, 교육, 복지 전반에 해당하는 프로그램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그러다보면 농활이 기존에 알던 농어촌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예품(23)씨도 그 중 한사람이다.

가는 곳마다 펼쳐지고 있는 다양하고 역동적인 일들에 놀라고 있어요.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농촌에 어떻게 이런 일들이 있는지 정말 흥미로워요. 제가 알던 농촌은 이렇지 않았거든요.”

 

 

 

 

사실 예품씨는 농촌이 익숙하다. 초등학생 때 전학을 와서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농촌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시골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어요. 그 전까지는 서울에서 부족함 없이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시골교회 목사 딸이 되었어요. 농촌생활에 적응하는 것도 힘들었고 갑자기 사람들이 저를 목사 딸이라고 부르는 것도 힘들었어요.”

예품씨의 아버지는 그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쯤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사춘기에 접어들 때부터 목회를 시작했다. 그녀는 변한게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목회를 시작하기 전까지 저는 서울 강남에 살았거든요. 친구들은 저보고 서울깍쟁이이라고 놀렸고 선생님은 제가 목사 딸이니까 참으라고 했어요. 그게 농촌에 대한 저의 첫 인상이었어요.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새로운 학교에 적응이 힘든 것도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그녀의 가정이 순식간에 바뀐 것도 농촌으로 이사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만나는 사람들 마다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양보와 배려를 강요하는 것도 도시로 나가면 금세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시가 그리웠어요. 그래서 가끔씩 도시에서 누가 온다고 하면 그렇게 설레었나봐요.”

조용하고 평화롭던 농촌교회가 부산스러워지는 날이 있다. 도시에서 손님이 오는 날이다. 온 가족이 몇 번이나 작은 예배당과 집을 쓸고 닦았다. 그 손님들이 도착한 것만으로 마을에 온통 활기가 돌았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녀는 분명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 저는 농활을 가면 제일 먼저 그 교회 목사님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요. ‘농촌교회 목사 딸이 어떤 느낌인지 저는 잘 알거든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작은 결핍이 있어요. 그걸 위로해 주고 싶어서요.”

그 시절 도시에서 온 손님들은 그녀와 그녀의 가정을 환기 시켰다. 이렇게 작은 농촌마을에 있는 한 목회자 가정을 잊지 않고 찾아와주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이었다.

농어촌 목회에 관심 가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농촌엔 답이 없다고 생각했죠. 그러던 중 만난 우양은 농어촌에서 목회를 하는 우리 가정과 교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주었어요. 우양과의 만남이 우리가족에겐 위로였어요.”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예품씨는 그 때의 기억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농활에 참여하고 있다. 올해만 벌써 세번째다.

어렸을 때는 농촌에 사는 게 참 싫었는데 철이 들고 나서는 농어촌교회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잖아요. 우양을 통해서 농어촌에 방문하고 조금이나마 그곳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저는 좋아요.”

 

 

 

지금은 농활을 통해서 농어촌을 돕는 것이 전부라고 말하지만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일에도 열심이다.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는 그녀의 꿈은 음악치료사이다.

음악치료를 통해 마음은 물론이고 몸까지도 치료가 가능하다고 해요. 내가 전공한 음악을 통해 누군가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대학원공부도 해야 하고 앞으로 배워야 할 것도 많아요. 하지만 꼭 음악치료사가 되어 제일 먼저 목회자 자녀들을 돌보고 싶어요.”

우양의 농활은 계속된다. 물론 예품씨도 함께한다.

농활을 다녀오면 참 좋아요.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직접 땀 흘리며 배우는 것도 많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고 또 힘을 얻어요. 다양하게 그리고 활기차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농촌에도 희망이 있다는 걸 느끼죠. 더 많이 청년들이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농활이야 말로 정말 힐링캠프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