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교회'에 해당되는 글 3건

  1. [닮고싶은청년 vol.17] 하나님은 도시에서만 일하시나요? 1
  2. [시골교회이야기5] 자연, 주민과 함께 아름다움을 일구는 성내교회이야기
  3. [시골교회이야기3] 아이들과 함께 자라나는 능동교회 이야기


사는 이야기농촌라이프

 

2005년 가을결혼도 안 한 여자 혼자 시골로 내려왔다. 1980년에 지은 오래된 건물이 언덕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시골교회는 작고 낡았다마을엔 하루 종일 고요와 적막이 흘렀고 심심한 날들의 연속이다예배가 있는 수요일과 주일 외에는 바깥 출입이 없었다.

 

경남 함안군 작은 시골마을언덕 위 작은 교회는 휑뎅그렁했다대치교회 이성혜 목사(37)는 아직도 첫 부임했을 때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도시에서만 생활한 이 목사가 시골생활 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속은 따뜻하지만 겉은 까치름한 동네 사람들의 시선이 그랬고도시와 떨어져 있으면 왠지 도태되는 것 같은 불안함도 있었다그런 이 목사가 벌써 7년째 대치리에 머물고 있다.

 

겁나게 재밌어요주님은시골 인심이 그렇잖아요콩 한쪽 나눠먹어 보니까 알겠더라고요이게 행복이라는 걸.” 조금은 지루하고 심심할 것 같은 농촌라이프를 이제 체득한 모양이다.

  

목회 이야기하나님은 도시에서만 일하시나요?’

 

신학교 시절 조직이 잘 갖춰진 큰 교회에서 일 해 보기도 했다여자여서 못한다는 소리는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었고누구보다 열심히 사람들을 세워갔고 교회를 섬겼다인턴과정을 밟고 있었기 때문에 단독 목회는 생각해보지도 않았었다그것도 시골교회에서.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다 뜻하신 바가 있는 것 같아요제가 목사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그 당시 힘든 일 때문에 도망치듯 이곳에 왔지만 누가 알겠어요. 7년 넘게 이곳에서 이렇게 목회를 할지.그러면서 알게 되더라고요하나님은 도시에서만 일하지시 않는다는 걸요.”

 

주일 대치교회 풍경은 이렇다. 11시 예배를 위해 사람들이 모인다어르신들 몇 명과 외국인 노동자들이 전부지만 어느 교회보다 밝고 활기차다. 3년 전부터 성경읽기제자훈련기도회 등을 했다먼저 터를 잡은 선배들은 어르신 한글학교어린이 공부방 등을 제안하며 할 수 있는 것을 해보라고 권했지만 이 목사는 달랐다. “교회마다 사명이 다르다고 생각해요다른 교회가 다 한다고 나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무턱대고 일을 벌였다가 가장 중요한 목회의 본질을 놓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물론 본인 능력이 없기도 한 게 더 큰 이유라며 겸손의 말을 한다.

 

대치교회 사람들

 

나는 술 먹고 담배도 먹고 다해무슨 세례고 집사야괜찮아하나님이 그런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그게 교횐가 

교회에 부인과 함께 오래 출석한 남자성도에게 어느 날 세례 받을 것을 권했다가 오히려 부끄러워 졌던 경험이다이 목사는 이런 교인들이 본인을 목사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처음에 마을 교회 목사로 혹은 여자 혼자의 몸으로 여러 가지 편견이 있었다거친 이 곳 사람들의 표현에 상처입기도 여러 번이었다어느 날 마을 어르신 한 분이 농협에서 주는 마을 달력이 있는데 그걸 집 앞에 놓고 가셨다그제야 마을에서 인정받았구나 생각이 들었다.

 

수년을 목사로 주일에 설교를 했지만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다곧 짐 싸들고 떠날 것 같던 여자로만 보였기 때문일까그러나 한 해 두 해 지나도 떠나지 않으니 마을사람들이 이 목사를 마을의 일원으로 알아줬다이 목사는 그제야 대치리 주민이 됐다.

올 초에 개인적인 사정으로 힘들어 하는 교인으로 있었다좋을 때는 함께 하는 게 당연하지만 힘들 때 함께 하는 게 진짜라고 믿었다결국 그 교인은 예배에 안 나오기 시작했다목회를 하면서 개인적인 어려움이 없겠는가마는 이번만큼은 이 목사 개인에게도 힘든 시간이었다나중에야 교회를 떠난 교인을 만날 수 있었다.큰 말이 필요 없었다. ‘미안하다네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다.’고 말했다아니라고 믿었지만 권위적인 자리에 앉아있는 자신을 돌아봤다관계는 어느새 풀어져 있었다목회는 사람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목사 자신이 바뀌는 것임을 알게 됐다.

 

교인들의 아픔을 지켜보고 기다려주는 것이 답이더라고요프로그램이나 제한된 시간 속에서는 바뀌지 않아요.”

  

평범해도 괜찮아.’ 솔직 담백한 여성 목사

 

이 목사에게 궁극적인 꿈을 물었다있는 자리에서 목회자로 평범하게 살고 싶단다예전에는 개척자가 되고 싶기도누구보다 더 알려지고 싶기도 했다. “나라고 늘 좋겠는가교인들이 때로는 밉기도 하다. “ 솔직한 이 목사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평범한 일상에 계시는 하나님을 목회자로 뿐만 아니라 아내로 엄마로 만나고 싶단다굳이 이름 하자면 생명목회다하나님의 창조세계 안에서 여자로서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다고 했다거창하지 않고 평범한 이야기지만 아직도 남성 중심의 기독교 목회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싶은 야무진 생각이다.

 

미자립이라는 말이 늘 불편하지만 빼 놓지 않고 물어봤다. “재정적으로는 늘 어려워요그러나 이 순간’ 만큼은 부족함이 없게 하시죠기적이 별건가요무던히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평범함이 기적이지 않나요.”돌아오는 대답은 역시나오늘도 대치교회는 조용하기만 하다.


 

강원도 홍천, 멋진 자연과 함께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는 성내교회를 찾다.

역시 강원도는 감자의 고장이다. 능선을 따라 굽이굽이 고갯길을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올라가다 보니 푸릇푸릇한 감자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능선을 따라 흘러가다 보니 어느덧 감자밭 길 사이로 아담한 성내교회가 보였다. 교회 입구에서 뵌 목사님은 교회 이곳저곳을 보수공사 하시느라 여념이 없으셨다. 7월 중순이면, 도시에서 여름수련회를 하기 위해 이곳 농촌교회로 오기 때문에 일손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시다면서도 잠시 숨을 돌리시며, 교회 여기저기를 소개해주셨다.

성내교회는 울창한 나무들로 이뤄진 산 아래에 있어 바로 앞에는 얕은 냇물이 흐르고, 뒤편으로는 따스한 햇볕과 함께 감자밭이 드넓게 펼쳐진 곳이다. 멋진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이곳은 30평 남짓 아담한 성전과 조립식 건물로 지어진 사택이 이어져 있었다. 특별히 목사님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소개해준 청년수련회장은 이번에 우양재단의 장기프로젝트에 선정되면서 마련한 곳이라 한다. 공사가 한창일 때 태풍피해로 천막이 찢어지기도 하고, 아직은 손볼 곳이 많다신다. 비닐하우스와 비슷하게 생긴 이 건물이 더워 보인다고 하니, 과학적으로 바람이 잘 통하는 방법을 이용해지었다며 자랑을 더하신다. 그래도 혼자 힘으로 이 모든 일을 하셨다고 생각하니 서울에 있는 열 교회가 안 부러울 정도로 멋져 보였다. 교회 주변을 돌아보다가 매우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피하고자 사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화전민이 세운 믿음의 터에서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하다.

성내교회는 1957년에 인근 지역에 사는 화전민들이 세워 올해로 54년이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우여곡절도 많았던 이곳은 골짜기마다 화전민들이 산을 개간하여 농지를 만들고, 마을을 이뤄 살아가던 곳이다. 1972년도에 있었던 무장공비사건으로 관심이 집중되던 무렵, 정부에서는 무장공비들이 숨어들기 좋다는 이유로 강제 철거 명령을 내렸고, 화전민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살아가던 터전을 잃고 말았다. 다행히 정부에서 도로변으로 2가구당 집을 한 채씩 지어주고 살게 해줬지만, 순식간에 일터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하나둘씩 도시로 떠나버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출석인원이 30명 이상이 되던 성내교회 또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점차 운영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교회는 2~3년 주기로 목회자가 바뀌고, 성도 수도 줄어들면서 결국, 성도 하나 없는 교회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저희가 11년 전에 농촌목회를 하겠다고 들어왔을 때, 마을 분들이 전도사님 언제 가실 거냐고 물으시더군요. 아무리 순수한 마음과 열정을 가지고 들어와도 당장에 생활이 되지 않으니깐, 나 하나는 굶어도 내 자식들까지 함께 굶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다 보니 결국 떠나게 되는 마음도 이해가 돼요.”

김용선 목사는 ‘늦게 시작한 목회자의 길’이기에 처음에는 도시에서 목회를 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마음이 허락지 않았고 이내 초심으로 돌아가 농촌의 파수꾼이 되기로 결심했다. 목사 내외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9.9평에 다 쓰러져 가는 건물에 성도는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라 농고를 졸업하고, ‘농어민후계자’인증을 받은 목사님은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쳤다. 마을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마을 이장도 하고, 마을에 상이 생기면 달려가 도왔다. 어느덧 성도하나 없던 교회는 30평대의 건물로 확장되고, 성도들도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해서 지금은 마을의 전체 30가정 중에서 올해로 8가정이 전도되었다.

90%이상이 노인으로 구성된 성도들과 참솔작목반을 일구다.

농촌의 많은 교회가 농사를 짓거나, 아동센터, 문화센터 등을 열어 농촌에 다양한 활동영역을 일구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성내교회의 경우 성도들의 90% 이상이 노인이며, 읍내와도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일궈나간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우선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간혹 젊은 부부나 아이들이 생기기라도 하면 이내 도심으로 이사를 가버렸다. 이곳은 지역 특성상 고랭지 지역이다 보니 겨울이 빠르게 다가오고, 농한기가 길기 때문에 주민 대부분이 수입이 적고, 어려운 가정들이다. 김 목사는 이러한 마을식구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던 중에 생각해 낸 것이 조합 활동이다.

이름 하여 참솔작목반! 김용선 목사는 사모와 함께 대출을 받아서 기계도 사고, 장독도 사서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참솔작목반을 꾸려나갔다. 감자떡도 만들고, 산나물을 캐서 말리고, 무청을 거두어 씨래기로 내다 팔며 왕성한 활동을 했다. 하지만 지나친 기대였을까? 사업이 번창하기 위해서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솥이 끓을 때까지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은 내일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신지 당장의 수입을 중요시하셨다. 시작할 때 받은 대출금을 갚아보기도 전에 결국 참솔작목반은 2년 전 부터 휴업에 들어가고 말았다.

돈 버는 일이 아닌 마을사람과 함께 마음 나누는 법을 익히다.

2년 동안 지은 농사는 유기농 농법을 고집해서 잡초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고, 목회활동과 겸하려니 오히려 지역주민에게 덕이 안 되어서, 제 작년부터는 농산물 판로개척과 목회활동에만 전념했다. 마을 이장활동으로 주민과 살을 비비며 서로를 알기에 노력하고, 절대 불교인 집안, 산을 섬기던 어르신 등 몇몇 집의 장례를 집도하면서 마을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이렇게 마을 일을 내 일처럼 나서다보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몇몇 가정이 교회도 나오고, 어느새 성도들도 점차 늘어갔다. 게다가 열악한 시설이지만 꾸준히 찾아오는 여름수련회장도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시설 보수공사도 지속적으로 진행되다 보니 내년쯤이면 자립교회로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단다.

2012년을 목표로, 다시 한 번 참솔작목반에 도전하다.

“몇몇 분과 함께 내년부터는 더덕을 재배해 보려고요. 참솔작목반도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참솔작목반이 중단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젊은 일손이 부족하고, 어르신과의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할 사람이 없던 것이 가장 컸다. 하지만 이제 교회에 장년층도 늘어나고 있고, 농산물 판로개척도 계속해왔기 때문에, 내년부터는 지역주민과 함께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교회가 마을에서 자리잡고, 함께하는 유기체로써 인식되어간다면 지역적 특성을 이기고, 목회를 시작할 때 꿈꿔왔던 함께 어울려 선을 이루는 농촌 목회를 이룰 수 있지 않겠냐며 미소를 지으신다.


※작목반 - 농촌에서 작목별, 지역별로 조직을 5인 이상 구성하여, 공동생산 및 공동 출하를 하여 농촌의 소득을 높이기 위해 농협이 주관하여 만든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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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고양리, 전통적 씨족부락에 선교지를 세우다.

서울에서 불과 40분 남짓한 거리에 위치한 능동교회는 수도권이라고 하지만, 논과 밭으로 둘러싸여 있고, 몇 년 전까지 만해도 도로를 따라서 젖소목장이 펼쳐져 있는 버스조차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였다.

지금은 공장들도 들어서고, 외국인들도 많이 들어왔지만, 처음에 여기 들어왔을 때만해도 양반이네, 상놈이네...뿌리깊은 유교적 관습과 불심으로 가득한 마을이었어요. 때문에 외지인에 대해 매우 배타적이었고, 교회가 들어서는 것에도 매우 부정적이었어요.”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반경 5km이내에 절만 3, 무속인이 4명이나 있는 전형적인 농촌부락이며, 유동인구도 거의 없는 전주 이씨의 씨족부락이다. 125년이나 된 오래된 선교지역이지만, 외지인에 대한 경계도 높은 편으로 아직까지도 복음화율이 매우 낮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인지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오랜 기간 동안 마음 아픈 일도 많았다. 원래 교회는 마을 안쪽에 위치해 있었단다. 하지만 초창기 새로 부임한 목사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면서 홀로된 사모님은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밤낮으로 기도하셨다. 그러나 그 기도소리를 들으신 마을 어르신들이 기도 소리를 곡하는 소리로 들으셨고, 이내 교회를 내보내려는 마을 사람들로 인해 결국 지금의 마을입구 도로변으로 나오게 되었다.

마음 아픈 일이었지만, 위기는 기회라고도 했던가? 이제는 넓은 도로가 들어서고, 사람들 눈에도 잘 띄는 예쁜 교회가 됐다. 이 모든 것이 능동교회를 거쳐 가신 많은 분들의 기도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뤄진 감사한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 때부터 이어진 기도와 정성 덕분에 지금은 대쪽 같으신 어르신이 두 가정이나 전도되었고, 다른 어르신들도 예배당에는 오지 않으시지만 목사님이 아프시기라도 한 날이면, 너 나 할 것 없이 문병을 오시며, '나는 안가도 애들은 가서 놀고, 공부하라고 해'라며, 교회에 자녀와 손자녀를 덥석 보내신다.


농촌목회에서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만들다.

제가 목회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접한 것이 아이들이고, 이곳 능동에 오게 된 것도 아이들과의 관계 때문인걸요.”

서울에서 불과 3040분 떨어진 곳이지만, 아직까지는 버스나 이동수단이 열악하여 아이들이 학교에 가려면 차량이 필요하다. 하지만 새벽부터 농사일에 바쁜 아이들의 부모는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줄 수 없어서 결국 인근 보습학원에 아이를 등록시키고, 학원차량으로 등하교를 시킬 수밖에 없다. 아이들 교육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해줄 수 없는 것이 농촌현실이다.



한번은, 피아노학원에 6년을 다닌 아이가 피아노를 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 이정복 목사는 이러한 농촌 현실에 답답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 때 그래, 아이들과 공부만이라도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공부방사업을 계획하였고, 우양에서 진행한 농어촌 목회자 세미나를 통해 정보도 얻어가며 열심히 준비했다. 이렇게 노력하는 모습이 예뻐 보이셨는지 마을 어르신들이 마을회관을 무상으로 임대해주셨고, 덕분에 생각보다도 빨리 공부방을 시작할 수 있었다.


챔버오케스트라를 꿈꾸다.

2007년부터 우양의 지원과 적극적인 외부 프로포절 신청을 통해, 아이들이 편안히 공부하고 체험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고, 2009년부터는 아이들의 다양한 재능을 키워주기 위해 11악기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악기라는 것이 연습하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데, 아이들과 연습하면서 관악기면 관악기, 현악기면 현악기, 각각은 되는데 하나의 소리를 낼 수 없는거에요.”

이정복 목사는 아이들이 함께 연습할 수 있기를 바라는 생각에 오케스트라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 후 오케스트라를 맡아줄 지휘자도 알아보고, 우양의 프로젝트사업비를 지원 받아 마침내 챔버오케스트라를 만들게 되었다. 이정복 목사는 챔버오케스트라를 통해서 아이들 본인이 갈고 닦은 재능을 발휘하고, 단조로운 농촌교회 예배의 변화를 꿈꾸게 됐다. 그 결과 부모들은 자녀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 교회에 찾아왔고, 마을 사람들을 서로 잇는 소통의 창구가 되었다. 교회의 의미가 확장된 셈이다.



쥐들이 피아노줄을 갉아먹고, 도마뱀과 씨름할지라도 농촌목회를 그만둘 수 없는 것은?

얼마 전 군을 제대하고 온 친구가 인사를 와서 이야기를 하는데 바뀐 성전과 늘어난 교인들로 너무 낯설었다하네요. 그 친구와 이야기 하면서 그 상황에 담당목사까지 없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렇게 많던 교회의 아이들이 청년이 되어서는 보이지 않는 다는 점을 꼬집으면서 이 목사는 말한다. “‘그 사람의 능력이 뛰어나던 뛰어나지 않던 누군가가 그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준다면 좋지 않을까요, 최소한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는 자리를 지키려고요

이제까지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아야하는 농촌의 작은 교회였다면, 앞으로는 지역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교회로 자리매김하려는 이 목사의 소망이 이뤄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