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의 봄은 우양재단의 100교회 사모들에게 특별하다. 그저 계절이 지나 돌아오는 그런 봄이 아니다. 꿈에 그리던 성지순례를 떠났고 그곳에서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좋은 동역자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동안 내 옆에는 예수의 성품을 닮은 길동무가 있었다. 그렇게 2주간의 성지순례를 마치고 사모들은 각자의 사역지로 돌아왔다.

“요즘 사모님이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을 줄을 몰라요.” 하늘단비교회 왕석종목사는 요즘 박지혜사모를 보면 참 신기하다. 성지순례에 가기 전에는 스마트폰을 전화기 이상으로 보지 않던 박 사모였다. 그랬던 그녀가 요즘에는 카카오톡이다 밴드다 이런 저런 어플을 통해 함께 성지순례를 다녀온 사모들과 매일 소식을 주고 받는다. 일상적인 안부부터 시작해서 목회현장의 고민, 농어촌에서 아이 키우는 엄마들의 정보 등 나눌 이야기는 넘쳐난다. 여자들의 수다란 원래 끝이 없다. 목사라한들 남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한국교회에서 목회자 사모로 살아간다는 것

“동병상련이라고 하잖아요. 사모는 어디가서 힘들단 소리를 잘 못해요. 힘들어도 울고 싶어도 혼자 꾹꾹 삼키고 기도하는게 다죠. 그런데 비슷한 처지의 농어촌 사모님들을 만나니 얼마나 신나는지 몰라요. 살짝 운만 띄어도 쿵하면 짝 소리가 나게 받아쳐 주니까요.” 목회자 사모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직업이라지 않던가. 제대로 목회자로 인정받지도 못하면서 목회자이상으로 감당할 부분이 많은 것이 우리나라의 사모이다. 힘듬을 소리 없이 감내하는 것이 그 큰 부분 중 하나이다. 그런 속앓이를 이해주는 친구들이 생기니 신이 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사모가 즐거워하니 목사도 즐겁다. 더불어 왕 목사가 섬기고 있는 군 부대 교회에도 새로운 바람이 분다. 사실 왕 목사와 박 사모는 신학교 동기다. 결혼 전에는 박 사모도 전도사 생활을 했었다. 결혼 후 사모라는 이름으로 왕 목사를 돕고 있지만 왕년에 신학교에서는 과 수석을 놓치지 않던 수재였다. 그러던 박 사모가 성지순례를 계기로 다시 말씀을 전할 기회가 생겼다. “처음에는 그냥 성지순례에 다녀왔으니 간증형식으로 해보면 어떨까 생각해봤어요. 그러다 조금 더 비중을 늘려 말씀시간을 전부 내주었죠.” 이젠 함께 군 교회에 가면 박 사모를 찾는 장병들이 더 많아졌다.

 

 

 

현재 하늘단비교회는 새로 교회를 건축하는 중이다. 성지순례를 떠나기 직전에 건축이 시작되어 박 사모는 성지순례를 떠나는 전날 밤까지 마음이 흔들렸다. “성지순례 짐을 싸면서도 내가 지금 잘 하는 것이 맞는지 생각이 많았어요. 그때 목사님이 평생 못 보내줄지도 모르니 기회가 있을 때 다녀오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절말 포기했을지도 몰라요. 아이들과 목사님, 그리고 한창 공사중일 교회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죠.” 어디 박 사모만 그랬을까. 간난쟁이 아기를 떼어 두고 온 사모나 아들을 결혼식 일정까지 당겨서 해치우고 성지순례를 온 사모까지 있다고 하니 농어촌 사모들에게 성지순례가 얼마나 특별한 기회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예배당은 작아도 괜찮아요. 그 대신 어르신들이 쉴 수 있는 공간에 중점을 두었어요.”

소소한 몇가지가 변하였지만 박 사모는 여전히 농어촌 개척 교회 사모이다. 농어촌에서 개척을 한다는 것은 때로는 지루할 만큼 무던하게 한길을 파야 한다는 것이다. 박 사모도 그것을 안다. 하늘단비교회가 수년째 마을을 섬기고 있는 방법은 마을의 노인정이나 독거어른신댁에 떡과 과일을 간식으로 전해 주는 것이다. 동네폐지를 주어 그 재원을 마련했다. 이것이 타지에서 온 젊은 목사부부가 마을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방법이다. 현재 공사중인 교회에 크고 화려한 예배당은 없다. “예배당은 조금 아담해도 괜찮아요. 그 대신 마을 어르신들이 편하게 들려 쉴 수 있는 공간에 중점을 두었어요. 지치고 피곤할 때 혹은 심심할 때, 언제든 갈 수 있고 늘 편안한 그런 곳이 교회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