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회 뒷 이야기

10월 8일. 토요일.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다. 복장은 최대한 편안하게 화장은 최대한 간소하게 하지만 선크림은 PA+++ 지수 높은 걸로 듬뿍. 오늘은 우양배 통일축구대회가 있는 날이다. 벌써 3회째 진행된 통일축구대회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석하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 준비는 기본이다. 아, 모자와 선글라스도 필수로 챙겨야 한다. 여자는 피부가 생명이기 때문이다.

대회가 펼쳐지는 경기장은 광명에 위치한 근로청소년복지관 인조 잔디 구장이다. 철산역 지하철 출구로 나와 방향을 잡는다. 못 잡겠다. 나는 천천히 지나가는 젊은 남자들을 스캔한다. 길은 젊은 남자들이 제일 친절히 알려준다는 내 신념은 늘 변함이 없다. 그리고 살짝 미소를 띠고 한 남자를 불러 세워 길을 물어본다. 역시나 가던 길을 멈추고 친절히 길을 알려준다. 참고로 난 아이폰이 있는 스마트한 여자다.

지하철 출구 근처에 여기저기 운동복을 갖춰 입은 사람들의 무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번 대회에 참가하는 팀임이 분명하다. 그들을 뒤로 하고 경기장을 향해 걷는다. 전날 대회 오리엔테이션에서 담당자인 영철 주임은 철산역에서 버스를 타라고 알려줬지만, 버스 이용으로 탄소가스를 배출하기보다 튼튼한 두 다리를 믿어보기로 한다. 아, 아메리카노를 손에 들고 걸어야 뽀대가 나는데 -커피를 들고 한적한 도시를 거니는 차도녀를 생각했지만- 여긴 아무리 찾아도 커피 파는 집이 없다.

경기장 주차장에 도착했다. 날씨가 좋다. 한 낮에는 해가 뜨거울 것 같은 예감이다. 벌써부터 피부가 걱정이다. 하지만 괜찮다. 난PA+++ 지수가 높은 선크림이 있다. 조금 있으니 대형버스가 들어온다. 사람들의 시선이 버스로 간다. 버스에선 선수들이 내리더라. ‘아, 버스를 대절해서 왔구나.’ 이것이 우리 대회의 수준이다. 갑자기 어깨가 으쓱인다. 비록 이 팀은 한 경기를 치르고 패해 짐을 싸야 했다.

그 남자의 사정

오늘 대회를 위해 우양 직원들이 많이 동원됐다. 물론 관심 있어 본인의 휴일을 반납하고 온 직원들도 있었다. 그중 장모 주임은 멀끔하게 슈트 차림을 하고 와서 다른 직원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누군 슈트 없어 청바지 입고나왔냐?”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직원이 한명 있었으니 그는 바로 홍보팀에 유모 주임되시겠다. 본인의 업무 분장은 사진 촬영이었지만, FC우양의 골키퍼로 경기를 뛰랴 본인의 교회 축구팀인 하나의FC가 남한 팀으로 대회에 참가해 그 경기 코치하랴 카메라는 나 몰라라 하더니, 나중엔 급기야 시합 중 코뼈가 부러진 선수와 함께 엠블런스를 타고 병원에 가 버리는 게 아닌가! 그래도 그 바쁜 와중에 찍은 사진 몇 장이 가히 전문가가 찍은 수준이라 할 수 있으니, 유모주임의 사진에 대한 천재적 소질은 인정하는 바이다.

그 여자의 매력

이번 대회에 또 하나의 볼거리는 각 축구팀의 매니저이다. 보통 매니저는 여성이며 각 팀 주장의 여자 친구인 경우가 많다. 하여 다른 선수들이 함부로 하거나 탐할 수 없는 자리임에 분명하다. 그 중 특별히 눈에 띄는 매니저가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우양FC의 매니저이자 우양재단의 미모의 이모 간사 되시겠다.

KBS 라디오 방송인 통일열차 리포터의 취재에도 흔쾌히 응해 낭랑한 목소리로 모두에게 감동을 안겼던 그녀는 이번 대회의 꽃으로 떠올랐다. 바로 대한 축구협회에서 온 심판들의 관심으로 몸살을 앓은 것이다. 소문이라는 게 원래 무서워서 대회 후 그 심판들이 우양재단 미모의 이모 간사에 대한 이야기 할게 뻔하고 그렇게 되면 전국 프로축구팀에 퍼지는 건 시간문제고, 이제는 심판을 넘어 프로축구 선수들 사이에서 소문이 날 것이며 이들이 국제대회 나가면 에이매치에도 이모 간사에 미모에 대한 이야기가 떠돌 거란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는 시점에서 이제 시집가는 건 걱정 없다며 안도의 한 숨을 내쉬게 되니 이 어찌 아니 기쁘랴.

그 선수의 코뼈

또한 올 해 통일축구대회에는 크고 작은 사고들이 있었는데, 그 중 우리를 가장 경악하게 했던 것은 외국인 팀인 KISSA의 선수 중 한명의 코뼈가 부러진 사건이다. 빠른 응급처치와 병원이송으로 대회는 무리 없이 진행됐지만,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인 나는 대회보다 그 선수가 걱정되지 않을 리 만무하다. 며칠 후 대회 담당자가 그 선수를 만났는데, 코뼈가 부러져 결국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까지 이르렀지만 상대편 선수를 원망하거나 본인의 상황을 비관하지도 않더라고 한다. 본인의 나라가 아니라 의료보험의 혜택도 받을 수 없어 막대한 병원비가 나오게 생겼는데도 말이다. 물론 병원비 걱정이 없었겠는가! 다행히 수술을 일정을 잡았다. 건강과 안정이 우선이다. 비용은 우양에서 댄다.

여자 친구가 화났어요.

이번 대회를 전체 총괄했던 청년 팀의 박모 주임은 대회가 끝난 다음 주 월요일 아침부터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찼다. 걱정되는 마음에 대회도 끝났는데 왜 그러냐 물었더니, 대회 준비하느라 여자 친구에서 소홀해서 여자 친구가 화가 많이 나서 걱정이라 했다. 이럴 땐 애정녀가 나서야 한다. 난 진심어린 충고를 해줬다. 앞으론 아무리 바빠도 아침, 점심, 저녁 세 번은 전화를 해야지 사귀는 사이라고 말해줬다. 오후 네 시쯤에는 꼭 문자 한통을 넣어줘야 한다. 물론 예외상황은 있다. 해외 출장 시에는 하루에 한번 문자로 대체한다. 박모 주임의 여자 친구의 화가 빨리 풀리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