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를전하는사람'에 해당되는 글 61건

  1. [닮고싶은청년 16] 노숙인들도 잘 살고, 저도 잘 살 수 있겠죠?
  2. [닮고싶은청년들 vol.14] 어릴적 꿈은 플레이메이커 지금은 '피스메이커'
  3. [닮고싶은 청년들 vol. 15] 스물여섯 인생 페이지에 희망을 그리다

 

 

 

노숙인들과 함께 일하는 옷걸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남들은 커다란 헌신이 필요한 일이라며 걱정하고, 배고픈 길이라고 우려를 표합니다. 전 그런 편견을 깨고 싶습니다. 지속 가능한 사업 모델을 만들고, 노숙인들의 자활도 꼭 도울 겁니다.”

 

 

(Do)손 컴퍼니

두 손이 서로 맞잡은 회사로고가 흥미롭습니다. 일하고 싶은 노숙인의 손과 이들을 돕고자 하는 손이 만난 회사임을 의미합니다. 탁월한 작명센스 뒤에는 노숙인 문제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기업을 시작한 이광수 씨의 땀과 열정이 숨어 있습니다. 사업가의 꿈을 포기할 수도, 노숙인 문제 해결에 대한 열정도 저버릴 수 없었던 광수 씨는 사회적 기업이라는 모험을 택했습니다. 자신의 꿈과 사회적 필요를 하나로 융합한 겁니다.

 

 

 

나눔의 가치를 알게 되면서

 

그는 평범한 대학생이었습니다. 봉사활동에 열심이었다는 점을 빼고는 말입니다. 대학 입학과 함께 활동한 대학연합봉사동아리 버뜨리랑은 광수 씨의 생각을 많이 바꿔 놓았습니다. 가벼운 학습지도로 시작했던 일은, 사랑이 고픈 아이들의 마음을 만지는 일이었습니다. 본인이 무엇을 준다기보다는 서로 주고받는 관계, 특히 봉사와 나눔을 통해 스스로가 받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군제대후에는 성균관대학교 SIFE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비즈니스의 긍정적인 힘을 통해 세상을 바꾸자는 슬로건이 제 가슴을 뛰게 했습니다. 소외계층의 삶의 변화를 통해 세상에 의미 있는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일했고, 대학로 소극단의 활성화를 목적으로 한 프로젝트는 나름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 SIFEStudents in Free Enterprise의 약자로, 비즈니스를 통해 사회적 약자의 자립을 돕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주로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지역사회를 발전시키는 비즈니스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대학로 소극단 지원 프로젝트를 통해 그는 사회적 기업에 대한 감을 익혀가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사회적 기업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업을 준비하던 즈음에 서울역 노숙인 강제 퇴거가 논란이 되고 있었고, 거리에서 생활하는 그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유럽여행에서 만난 노숙인들이 빅이슈를 판매하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도 함께 떠올랐습니다.”

 

옷걸이로 사업을 한다고?

 

소외계층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꽤나 다양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 나섭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노숙인들의 문제를 제대로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역 주변의 거리 노숙인들을 직접 만나고, 관련 단체를 방문하면서 공부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노숙인들의 알코올 중독, 우울증 등 정신건강 측면과 자활의지 부족 문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보람을 줄 수 있는 일자리였습니다. 물론 기업으로서 이익도 창출하고, 사회에도 기여해야했습니다.

 

 

그렇게 고안해낸 것이 바로 친환경 옷걸이 프로젝트’. 옷걸이가 돈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게다가 이를 만드는 사람들이 노숙인 들이라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만류했습니다. ‘그거 해서 돈이 되겠어? 헌신하고, 봉사하는 그런 거잖아?’ 광수 씨는 이런 사회의 시선이 불편합니다.

 

사회적 기업을 하고 싶었는데, 분명 현실적인 장벽이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면이 컸고, 사회적 기업을 보는 시선들이 불편했어요. 제가 봉사단체를 하는 것도 아니고, 기업을 하고 싶은 건데도 그랬어요. 저는 이런 편견들을 비즈니스로 깨뜨리고 싶어요. 그래야 다른 젊은 사람들도 희망을 가지고 도전할 수 있잖아요.”

 

그의 설명에 따르면 프랑스에는 사회적 기업으로 재벌의 반열에 오른 기업도 있습니다. 사업으로 성공할 여지가 있다는 겁니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 후회를 남기지 않을 생각뿐입니다. 이미 두손 컴퍼니는 소중한사람들이라는 노숙인 쉼터와 연계해 일을 시작했습니다. 자활의지가 있는 노숙인들과 옷걸이를 만들고, 거기 들어가는 종이에 광고를 넣을 생각입니다. 이미 만 삼 천여개를 만들었습니다. 현재는 열심히 광고주를 찾는 중입니다.

 

사회적 기업도 결국은 기업입니다. 일반 기업과는 다르지만 비영리 단체와는 성질이 다릅니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관심이 있지만, 수익을 창출해서 지속가능한 기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옷걸이 백만사태를 꿈꾸다.

 

당장은 옷걸이를 백만 개 정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선 자신감이 느껴졌습니다. 사업에 대한 확신도 보입니다. 그는 정부가 노숙인에게 주는 일자리가 많이 아쉽다고 했습니다. 노동의 대가로 한 달에 30만원 준다고 하면 나설 노숙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단기적인 일자리는 노숙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속가능한 일자리여야 합니다. 또 노숙인분들이 거리생활을 오래하셔서 기술이 떨어진 상태인데, 이를 고려한 근로의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

 

옷걸이 프로젝트는 오랜 고민과 시행착오 끝에 나온 결론입니다. 사업 구상 단계에서 헌책을 판매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폐휴대폰에서 광물을 캐내는 안도 제기되었지만, 현실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옷걸이 프로젝트를 제대로 끌고 가는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20대의 젊은 사업가가 커다란 기업의 광고주를 상대하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저는 이 일을 오래하고 싶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일에 강점을 가진 사람인지 고민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업을 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확고한 믿음? 신념? 을 가지고 싶습니다.”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그것

 

이제 두손컴퍼니의 사업은 광수 씨의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함께 일하는 파트너, 그리고 그 너머에서 일손을 보태는 노숙인들이 있습니다. 그는 책임감보다는 스스로 사회에 뭔가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더 힘을 얻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사회한원이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성장이라고 대답한 적 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많아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내가 성장하면서 얻게 되는 것을 나누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내가 이 사회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줄 수 있다는 사실도 감사한 일입니다.”

 

그는 지금 하는 일을 재미있다고 표현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될 것입니다.

제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 바로 세상 가장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비즈니스입니다. 전국에 계신 기업인 여러분들 연락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러분의 광고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Do)컴퍼니의 또 다른 의미인 행동하는(Do) 을 기대해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취업고민이요? 왜 없겠어요? 그래도 어떤 직장에 어떤 조건으로 갈지 걱정하고 있지는 않아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고 믿고, 그곳이 어디인지 찾다보면 길을 발견할 거라는 믿음이 있거든요.”

 

동철민 씨(28세)는 어린 시절 축구선수를 꿈꿨던 평범한 코리아(!) 청년입니다. 2012년을 사는 평범한 청년들이 느낄만한 취업, 결혼, 꿈의 압박이 대단할만한데도, 그는 소탈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 왔습니다. 게다가 유창한 서울말까지. 또래보다 약간 작은 키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철민 씨가 북한출신이라는 걸 몰랐을 겁니다.

 

북한에서 중국을 거쳐 한국에 온지 어느덧 8년. 남들과 똑같이 평범하게 살고있는 듯 하지만 특별한 꿈을 가슴에 품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아! 축구선수의 꿈은 어렸을 때 접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날 인터뷰에서 제4회 우양배 통일축구대회 출전에 대해서는 기대를 감추지 못했습니다.

 

K1 : Korea is one

 

“북한에서는 축구가 최고 인기 스포츠였어요. 그래서 축구를 좋아하게 되었고,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제가 그렇게 축구를 잘하는 편은 아니더라고요(웃음). 그래도 그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북한에서 내려온 또래 친구들과 축구클럽을 결성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팀 이름은 K1. Korea는 하나다(Korea is one)라는 뜻이랍니다. 평화로운 팀명처럼 축구장에서도 평화를 사랑한다는 이들. “경기에서 무조건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함께하는 동료들과 즐기는 축구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막상 주심의 휘슬이 울리고, 경기장에 들어서면 승부욕이 발동하더라고요. 사실은 그런 상황이 저희를 테스트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자신과의 싸움, 마인드컨트롤이 되는지 알아보는 거죠.”

 

“지금은 탈북출신 청년들이 모인 팀이지만 앞으로는 남북출신 상관없이 팀을 운영할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로 같이 가야하니까요” 이런 K1이 올 9월 15일에 제4회 우양배 통일축구대회에 출전합니다. 출사표의 내용이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승부를 넘어 평화의 길

 

“제1회 우양배 통일축구대회 때 저희가 준우승을 차지했었는데, 모르셨죠? 그런데 그 이후로는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았어요. 운 나쁘게도 강팀을 만나기도 했고요. 그런데요 성적이나 상금이 우리 팀의 목표는 아니에요. 대회의 의미는 따로 있죠. ‘소통’ ‘화해’ 그리고 ‘작은 통일’입니다.”

 

철민 씨는 탈북청년과 남한청년들을 한자리에 모은 축구대회에 남다른 기대를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다른 배경을 지닌 친구들이 모여서 어울리는 것, 그것이 작은 통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축구경기의 승패와 상관없이 매년 축구대회에 참가하고 있어요.”

 

얼마 전 있었던 대회 조 추첨에서 K1은 숭실대학교 축구동아리와 예선전에서 맞붙게 됐습니다. 예선전을 이긴다면 축구국가대표팀이 훈련하는 천연잔디에서 뛸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다보니, 팀들 사이에 묘한 긴장이 있을 법한데, 철민 씨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저희가 조 추첨 후에 숭실대 팀에 친선시합을 하자고 연락을 해서 조만간 함께 그라운드에서 뛸 거 같아요. 공식 시합 전에 말이에요. 사실 그동안 저희가 탈북출신 팀들하고 줄곧 경기를 했었거든요. 이번에 남한청년팀과 맞붙게 되었는데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소통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전력노출 이런 게 문제겠어요? 자주만나서 부딪히고, 싸우기도 하고 그래야 친해지지 않겠습니까” 철민씨는 승패보다 더 중요한 것을 우양배 통일축구대회에서 얻은 듯 보입니다.

 

 

화해를 만드는 자리에 서있고 싶다.

역시 축구는 철민 씨에게 취미이고, 소통의 도구일 뿐입니다. 철민 씨는 더 나아가, 소통을 가능하게 만들고, 갈등을 최소화시키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한국사회에 갈등이 많잖아요. 지역적으로 계층적으로요. 앞으로 통일이 되면 더 큰 갈등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그 갈등의 중요한 해결점은, ‘사람’ 혹은 ‘사람의 마음’에 있거든요. 그래서 ‘사람과 사람사이를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을까’에 제 미래를 걸어 보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이 정리된 다음부터 그는 주변의 갈등의 현장을 찾았다고 합니다. 작게는 깨진 인간관계부터 시작했습니다. “과거에 싸웠던 친구를 만나서 용서를 구한 게 첫 번째 시작이었어요. 그리고는 비슷한 경험이 있는 주변 친구들에게도 제 경험을 나누어 주었죠. 축구하다가 생긴 갈등도 그런 식으로 회복할 수 있도록 돕기도 했어요.” 이런 사소한 경험들이 나중에는 커다란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준비과정이라고 철민 씨는 믿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사람

 

“한반도에서도 갈등 해소 과정은 분명 필요할거고요. 거기에 제가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런 게 통일을 준비하는 거기도 하겠죠. 최근에는 북한에서 온지 며칠 안 된 친구들을 만났어요. 급격한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충격을 받아 한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 친구들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조언을 해주고도 싶어요.”

 

먼저 탈북한 선배로서의 역할을 하고 싶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북한과 중국에서 엄청난 육체적 고통을 겪어 남한 생활을 자신만만했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고민. 즉 학업, 취업, 가정문제, 스트레스 앞에서 무력했던 과거를 떠올렸습니다.

 

“저는 제가 한국에서 곱게 자란 친구들보다 뭐든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요. 그건 착각이었어요. 각 사회 마다 다른 종류의 고통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심지어 한국청년들이 겪는 정신적인 고통이 우리가 겪은 것보다 더 힘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경험도 해보고,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나가서 부딪혀 보는 게 가장 큰 경험이죠. 그러면서 생기는 실수와 격차를 줄여나가는 게 인간과 사회 사이의 화해의 과정인거고요.”

 

10년 후 쯤엔 무엇을 할 거 같냐고 물었더니, 적어도 소형차 한 대는 몰지 않겠냐고 했습니다. 소박한 꿈이다 싶었는데 웬걸. “어디 내가 나설 데(갈등의 장소)가 없나 찾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차가 필요하다”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저도 남들처럼 안정적인 삶을 꾸리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을 찾아서 할 거에요. 그래서 십년 뒤에도 이십년 뒤에도 소형차 하나 끌고 다니며 갈등의 장소를 찾아다닐 겁니다. 한반도 이 땅에 분명 필요한 일이잖아요.”

 

누군가 짜놓은 틀에 갇혀 스펙과 연봉이 인생의 전부라고 여기는 불쌍한 이들 사이에서, 조금은 남다르고 미련한 청년 하나쯤은 있어도 좋을 거 같습니다. 특히 의미 있는 일에 젊음을 던지려는 동철민 씨같은 사람이라면, 유별나게 겁 없이 살아도 충분히 닮고싶은 청년일 겁니다.

 

 

 

 

 

청년은 수줍게 웃었다. 이야기 하는 내내 눈빛은 반짝였다. 마지막에는 꽤나 진지하게 질문을 던졌다. 인간은 누구나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데 다들 그 시간을 어떻게 겪어 내는지가 궁금하단다. 청년은 지금 어디선가 알 수 없는 곳에서 날아온 두려움과 맞서고 있는 듯 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진로를 결정해야하는 청년들은 미지의 터널 앞에서 아마도 저런 고민을 하겠구나 싶어지니 이내 이해가 됐다.

 

스물여섯. 장로회 신학대학교 기독교 교육과 4학년 이다빛 씨는 현재 교회 전도사다. 으레 신학대학교 학생들을 학부 때부터 ‘사역’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서 수련과정을 거친다. 그런 그가 졸업을 앞두고 신학대학원을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목회자의 길을 가지 않겠다는 거다.

 

“저는 저를 구원한 복음에 감사한 거지 직업으로서 목사가 되고 싶진 않아요.”

 

 

 

스물여섯, 자연을 닮아 살기로 하다.

 

고등학교 1학년까지 도시에만 살던 이다빛 씨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연과 환경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훗날 경기도 광주 산속으로 이사해 집을 지었는데 황토로 벽을 바르고 너와를 올려 지붕을 만들었다. 지금 그 집은 어머니가 목사 안수를 받고 교회를 개척하면서 교회로 사용하고 있단다.

 

“처음에는 어머니 생각을 듣기만 했어요. 근데 어느새 제 삶에 영향을 미쳤더라고요. 대학에 와서 깨달았어요. 제가 자연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요.”

 

이다빛 씨는 졸업 후 경기도 여주에 있는 농업경영전문학교에 들어갈 생각이다. 전액 국비지원이 되는 것도 이유이고 앞으로 농사를 짓고 살고 싶은데 농사에 농자도 모르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란다. 사람이 노동을 하는 것은 필수인데, 얼마나 땅에 가까운 노동을 할 것이냐가 고민이었다. 그리고 그는 농사야 말로 삶에 근본적인 기쁨을 준다고 믿고 있었다.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에요. 남들보다 조금 더 삶의 자리를 자연으로 옮기고 싶은 거죠. 어떻게 살아야할지는 아직도 고민 중이지만.”

 

환경에 대한 우려가 많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사람들의 무관심이 의아하고 이상했다. 웰빙 바람이 한창 불었을 때도 그랬다. 정말 건강하게 잘 사는 게 무엇인지 사람들은 모르는 듯 했다고 이다빛씨는 말한다. 그는 전인격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주변에 농업에 종사한 사람이 없다 보니 여전히 걱정이다.

 

 

 

 

장학생으로 만난 우양과의 인연

 

목회자 자녀 장학생이 우양과의 처음 인연이었다. 장학금이야 뭐 학비 걱정 없이 공부하는 정도로 이해될 만한데 이다빛 씨는 조금은 달랐다. 학교 공부를 너머에 있는 다른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단다. 그 중 하나가 우양의 농어촌 프로젝트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시골로 농활을 다녀왔다. 장학생이어서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는 프로그램이었지만 나름 많은 의미를 건저 올린 듯 했다.

 

“올해는 더덕 밭에서 일을 돕고 왔어요. 더덕을 잘 캘 수 있게 밑 작업을 하는 건데요. 그 덕에 더 새까매졌어요.”

올해는 우양의 농어촌 교회 지원사업인 청년프로젝트 공모에 지원해 당선이 됐다. 이다빛 씨는 경기도 광주지역에서 친구들과 함께 연주팀을 꾸려 찾아가는 문화공연을 하고 있다. 땅은 넓은데 상대적으로 인구가 퍼져있는 경기도 광주의 지리적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생각이다. 대부분 비전공자들로 구성된 꿈꾸는 땅 문화공연팀은 지역사회에 정신적으로 영향을 주고 싶다는 당찬 청년들로 구성되어있다.

 

장비는 드럼, 건반, 베이스가 전부다. 연주 실력도 한계는 있다. 각자 생계가 있다 보니 한번 모여 연습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이번 프로젝트 당선으로 받은 지원금은 대부분 악기를 구입하는데 사용할 예정이다.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처음에 비하면 지금은 시쳇말로 잘 나가고 있다.

 

꿈꾸는 땅 문화공연팀은 로뎀여성폭력상담소 부설 사회적 기업이다. 어머니가 운영하는 이 기관은 성폭력 피해자 상담을 주로 하다가 예방의 중요성을 깨닫고 지역 복지관이나 시설에서 문화공연과 함께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찾아가는 문화공연은 그런 교육이 왜 필요하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음악을 통해 마음을 여는 게 목적이다.

 

“문화나 정서적인 부분은 삶에 많은 부분에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해요.”

 

 

청년의 고민은 끝이 없다. 그래서 청년이다.

 

사춘기시절 인간사이 갈등과 분쟁을 겪으면서 그 때 처음 인간은 혼자 살 수 없구나 싶었다. 외아들로 혼자 큰 것도 영향이 있었다. 영화를 많이 보며 자랐다. 영화 속 이야기와 현실은 괴리가 있지만, 영화에서처럼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이다빛 씨다. 그런 그의 장래희망은 ‘아빠’다. 시간이 흐르면 당연히 ‘되는’ 일이잖아 싶다가도 가장 기본이 되는 가족 안에서 보다 깊고, 진지한 관계를 누리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였다.

 

“어릴 때 공부를 안했어요. 그래도 고민은 있었죠. 중고등학교 내내 내성적이었어요. 뭔가에 얽매이고 싶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어요. 현실에 적응하는 범위 내에서 나를 자유롭게 하고 싶어요.”

 

재능은 있지만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에게 음악을 접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을 하고 싶다는 이다빛 씨. 어쩌면 그 일을 이미 시작한건지도 모르겠다. 요즘 세상에 젊은 사람이 농사지어서 어디 밥벌이나 하고 살겠냐는 모진 질문에도 한 줌 웃음을 잃지 않으며 하고 싶은 일과 생계 사이의 간극에 대해서 고민도 놓치지 않는단다. 마냥 어리지만 않은 현실에 든든히 발 묶어놓고 있는 청년이다.

 

인생의 다음 단계를 위해 어떻게 살까하는 고민은 누군들 없겠냐마는 인생의 질문에 슬기롭게 질문에 대답해 가는 모습에서 오히려 희망을 본다.

 

‘지금은 연약해도 괜찮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