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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즐거운텃밭 여덟] 텃밭 청년, 나눔을 수확하다
 

 

옥상에는 열무가 무르익었다. 고추는 신선한 붉은 빛을 띠며 초보 농사꾼의 맘을 설레게 하지만, 밭에 나가 일할 맛은 나지 않는다. 태풍이 올라오는데 밭에 나가 일하는 농사꾼을 본적이 있는가? 필자도 여느 농사꾼들처럼 이날만큼은 밭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밭일을 해야만 했다. 어르신들에게 고추와 열무를 나눠드리기로 약속한 시간이 이미 지나 버렸고, 한시 바삐 배추와 무를 파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뿐이랴, 텃밭 청년들을 초청하여 같이 열무로 반찬삼아 저녁이나 거하게 먹어보자고 약속한 날이 태풍치던 바로 그날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그간 약간 바빴다. 하지만 농사의 세계에서는 바쁘다는 핑계 따위 통하지 않는다. 하늘을 원망하며 우비를 입고 밭에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각오했지만 늦여름의 태풍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우비는 입고 있었지만 비가 들이쳐 바지는 점차 젖기 시작했고 양말은 이미 축축해져 신발 벗기도 힘겨웠다. 필자는 어느 덧 신발 속의 땀과 비가 한껏 섞여 그리 좋지 않은 냄새를 풍길 거라는 두려움과 함께 무좀의 대한 더티(dirty)한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꾸준한 노력 끝에 최근에서야 무좀과의 인연을 끊었었지만, 이번 일로 다시 무좀이란 녀석이 평생 친구하자고 들러붙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수확을 하던 군에서 갓 제대한 풋풋한 청년이 말했다. “선생님 우비 입으면서까지 여기서 밭일할 줄은 몰랐는데요.” 나도 몰랐다. 날씨가 왜 이렇게 괴팍스러운지 모르겠다. 수확하려고 하면 태풍이 온다고 하고 날짜 미루면 왜 그리 하늘이 평온한지. 이렇게 된 마당 얼마 전 예비군에 합류한 풋풋한 청년과 신나게 열무를 뽑기로 했다.

 

 

 

우양은 봄, 여름의 밭농사를 마무리할 즈음 그동안 수고했던 텃밭 청년들을 옥상으로 초대하곤 했었다. 옥상의 작은 상자 속 얼마 남지 않은 열무와 고추는 이제 여름작물 수확을 마칠 젊은 농사꾼들에게 돌아갈 작은 보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가 오는 바람에 옥상의 선선한 가을바람을 느끼며 열무로 저녁을 준비하는 것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싱싱한 열무를 두고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는 법. 텃밭 청년들을 데리고 옥상에서 내려와 우양의 오랜 친구인 어탕국수집으로 이동했다.

 

합정동에 위치한 어탕국수집은 사장님의 따스한 마음이 담긴 어탕으로 어르신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하지만, 매콤한 돼지 주물럭으로도 우양인들에게 이미 명성이 자자하다. 텃밭청년들이 열무를 한손 가득 쥐고 매콤한 냄새로 가득한 어탕국수집을 찾았다. “이건, 사장님꺼고, 이거는 씻어서 쌈하고 같이 갖다주세요.”라고 말하고 열무 두 바구니를 주방에 털썩 내려놓았다.

 

 

그리곤 텃밭 청년들은 자리 앉아 TV를 켠다. 얼마 전 S방송국에서 촬영한 텃밭 청년들에 대한 내용이 시사 프로그램에 방송되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TV프로그램을 보며 서로 깔깔대기도 하고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TV에 눈을 때지 않는 텃밭청년들. 텃밭을 부지런히 가꾸며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에게 직접 찾아가 작은 채소를 나눠드렸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나보다. 옆에서 같이 TV를 보시던 어탕국수 사장님이 흐뭇하게 웃으신다. 그 웃음이 텃밭 청년들의 해맑은 웃음과 닮았다. 어떤 시간, 어느 장소에서건 나눔을 실천하는 이들의 웃음. 그 기분 좋은 느낌. 아마 그게 서로 통했으리라.

 

본인들이 직접 수확한 싱싱한 열무와 푸짐한 돼지 주물럭을 저녁삼아 한자리에 모인 그들은 다시 시작될 한 학기를 기대한다. 새롭게 시작할 농부학교, 과제들과 약속들도 이야기한다. 더웠던 여름은 시원한 빗소리와 함께 떠나가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만은 여전히 햋빛이 내리쬐는듯한 열정어린 마음은 여전하다. 그리고 우양은 항상 그들을 응원할 것이다.

 

 

이튿날 빗속에서 수확했던 열무와 고추를 어르신들께 나눠드렸다. 마치 생신맞이 하신냥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면 그 장면을 놓치기 아까운 순간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살짝 사진기를 들고 어르신들 웃음을 찍어보았다. 나눔이란 이런 행복한 기분이 아닐까. 고생하고 수고한 것들을 이웃들과 나누며 느끼는 기쁘고 (무좀 걱정도 잊을 수 있을 만큼) 보람찬 기분 말이다. 이 글을 보는 이 동네, 저 동네 아줌마 아저씨, 처녀, 총각들, 막걸리라도 한잔 하면서 나눔이란 뿌듯한 녀석 한번 경작해볼 생각 없는지. 지치고 각박한 삶 속에서 텃밭의 여유와 나눔을 누려보길 소망한다. 필자가 우양의 옥상에서 항시 대기 중이니 언제든 연락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