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 해당되는 글 2건

  1. [도시청년, 농어촌에 가다 #2]너른 감자밭에서 인생을 논하다
  2. [시골교회이야기5] 자연, 주민과 함께 아름다움을 일구는 성내교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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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가 굳는 시간동안만 이라고 생각했던 수다와 게임은 깊은 밤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우양청년들은 용케 새벽예배도 드리고 약속된 시간에 일어나 아침을 먹습니다. 평소였으면 아침밥보다는 잠을 택했을 청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계속될 밭일을 생각하면 아침은 필수 사항입니다.

 

 

2박3일 동안 우리의 주방장를 자처한 인예장학생은 남들보다 2시간은 더 먼저 일어나 밥을 합니다.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할 청년들을 생각하며 엄마의 마음으로 아침 차려줍니다. 거기에 사모님이 가져다주신 몇 가지 나물 반찬을 더하니 금세 영양식 밥상이 됩니다. 우양청년들 사랑과 영양으로 오늘도 충전 완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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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땔감용 나무를 하러갑니다. 여자들은 감자밭에 잡초를 뽑으러갑니다. 아침을 먹고나오자 교회 앞에 준비되어 있던 트럭을 타고 아직은 멍한 기분으로 밭을 향해 갑니다. 얼마나 타고 왔을까. 넓은 감자밭이 펼쳐집니다. 여기가 강원도라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입니다. 사실 여름은 이미 감자 수확 철입니다. 그러나 강원도는 여름에 감자를 캐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서늘한 고랭지 밭에 묻혀있는 감자는 가을까지 보관됩니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감자가 생산되지 않는 늦가을과 겨울에 감자를 내다 팝니다. 그래서 오늘 할 일은 가을과 겨울까지 감자가 잘 묻혀있을 수 있도록 감자밭에 잡초를 제거 해주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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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 하나를 뽑는 일 자체를 힘든 일은 아니지만 이 뙤약볕 아래 끝이 보이지 않은 감자밭을 오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어지럽고 허리가 아픈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함께할 동지들이 있으니 힘을 내어 봅니다. 각자 한 고랑씩을 담당하고 자신이 맡은 구역에 잡초를 모두 제거 합니다. 처음에는 두런두런 이야기도 하면서 잡초를 뽑았는데 30분도 안 돼 다들 말없이 잡초 뽑기에만 집중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해는 점점 뜨거워집니다. 잠시 그늘에 모여 쉬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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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물 한 모금을 마시자 이제 겨우 말문이 트입니다. 그리고는 길옆으로 작은 개울이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 둘 신발을 벗고 개울에 발은 담급니다. 발끝부터 전해져오는 차가운 기운에 멍했던 정신이 맑아집니다. 잡초를 뽑는 일로 꼬박 반나절을 보내고 나니 다들 농사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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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농사를 짓다보면 하루가 한 계절이 일 년이 금세 흐르겠어요. 땀 흘리며 하루를 열심히 일하고 그만큼 맛있게 밥 먹고 사는 것도 보람될 것 같아요.” 은혜는 반나절 만에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입니다.

“저는 피아노 연습하던 게 생각났어요. 피아노 연습을 하다보면 정말 이렇게 하루 종일 피아노치고 밥 먹을 시간이 되면 밥 먹고 또 하루 종일 피아노연습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하루 종일 피아노를 쳐도 금세 실력이 느는 것 같지 않아요. 연습은 지루하고 실력은 그대로인 것 만 같죠. 그런데 한 달이 지나고 한 계절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면 분명 달라져요. 늘 똑같아 보이는 일상을 참고 쌓아가는 것이 인생인가봐요.” 피아노를 전공하는 시온이도 농활에 와서 삶을 배워 갑니다. 감자 뿐 만아니라 우양청년들도 자라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트럭 안에서 창문을 활짝 엽니다. 매연 없는 산 공기가 상쾌하고 아침에는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이제야 보입니다. 열심히 땀 흘린 후 만나는 새로운 세상입니다. 모두들 신나게 트럭드라이브를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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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일과를 끝내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바비큐 파티입니다. 어제 손수 딴 깻잎은 물론이고 사모님이 직접 가져다주신 맛난 김치와 나물 반찬도 풍성합니다. 시골 장독에서 꺼낸 된장으로 끓인 찌개 맛 역시 일품입니다. 가로등하나 없는 교회마당에서 우양청년들은 하늘이 깜깜해지도록 신이 났습니다. 연탄불에 굽는 고기야 언제나 맛이 있지만 함께 하는 사람들 간의 따뜻한 마음이 가장 맛있는 반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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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 일정은 교회 대청소입니다. 2박3일 동안 신세졌던 성내교회 구석구석을 열심히 청소합니다. 남는 건 사진 뿐 이라며 아쉬운 마음을 담아 여러 장의 사진을 남깁니다. 하지만 여기 모인 장학생들은 모두 알고 있어요. 우리의 만남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것을요. 그렇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기로 했습니다. 우양청년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더 멋진 모습으로 힘내기로 해요. 모두 파이팅!!

 

 

 

강원도 홍천, 멋진 자연과 함께 소박한 아름다움이 있는 성내교회를 찾다.

역시 강원도는 감자의 고장이다. 능선을 따라 굽이굽이 고갯길을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올라가다 보니 푸릇푸릇한 감자밭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능선을 따라 흘러가다 보니 어느덧 감자밭 길 사이로 아담한 성내교회가 보였다. 교회 입구에서 뵌 목사님은 교회 이곳저곳을 보수공사 하시느라 여념이 없으셨다. 7월 중순이면, 도시에서 여름수련회를 하기 위해 이곳 농촌교회로 오기 때문에 일손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시다면서도 잠시 숨을 돌리시며, 교회 여기저기를 소개해주셨다.

성내교회는 울창한 나무들로 이뤄진 산 아래에 있어 바로 앞에는 얕은 냇물이 흐르고, 뒤편으로는 따스한 햇볕과 함께 감자밭이 드넓게 펼쳐진 곳이다. 멋진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이곳은 30평 남짓 아담한 성전과 조립식 건물로 지어진 사택이 이어져 있었다. 특별히 목사님이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소개해준 청년수련회장은 이번에 우양재단의 장기프로젝트에 선정되면서 마련한 곳이라 한다. 공사가 한창일 때 태풍피해로 천막이 찢어지기도 하고, 아직은 손볼 곳이 많다신다. 비닐하우스와 비슷하게 생긴 이 건물이 더워 보인다고 하니, 과학적으로 바람이 잘 통하는 방법을 이용해지었다며 자랑을 더하신다. 그래도 혼자 힘으로 이 모든 일을 하셨다고 생각하니 서울에 있는 열 교회가 안 부러울 정도로 멋져 보였다. 교회 주변을 돌아보다가 매우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을 피하고자 사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화전민이 세운 믿음의 터에서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하다.

성내교회는 1957년에 인근 지역에 사는 화전민들이 세워 올해로 54년이 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우여곡절도 많았던 이곳은 골짜기마다 화전민들이 산을 개간하여 농지를 만들고, 마을을 이뤄 살아가던 곳이다. 1972년도에 있었던 무장공비사건으로 관심이 집중되던 무렵, 정부에서는 무장공비들이 숨어들기 좋다는 이유로 강제 철거 명령을 내렸고, 화전민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살아가던 터전을 잃고 말았다. 다행히 정부에서 도로변으로 2가구당 집을 한 채씩 지어주고 살게 해줬지만, 순식간에 일터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하나둘씩 도시로 떠나버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출석인원이 30명 이상이 되던 성내교회 또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점차 운영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교회는 2~3년 주기로 목회자가 바뀌고, 성도 수도 줄어들면서 결국, 성도 하나 없는 교회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저희가 11년 전에 농촌목회를 하겠다고 들어왔을 때, 마을 분들이 전도사님 언제 가실 거냐고 물으시더군요. 아무리 순수한 마음과 열정을 가지고 들어와도 당장에 생활이 되지 않으니깐, 나 하나는 굶어도 내 자식들까지 함께 굶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다 보니 결국 떠나게 되는 마음도 이해가 돼요.”

김용선 목사는 ‘늦게 시작한 목회자의 길’이기에 처음에는 도시에서 목회를 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마음이 허락지 않았고 이내 초심으로 돌아가 농촌의 파수꾼이 되기로 결심했다. 목사 내외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9.9평에 다 쓰러져 가는 건물에 성도는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농촌에서 태어나고 자라 농고를 졸업하고, ‘농어민후계자’인증을 받은 목사님은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쳤다. 마을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마을 이장도 하고, 마을에 상이 생기면 달려가 도왔다. 어느덧 성도하나 없던 교회는 30평대의 건물로 확장되고, 성도들도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해서 지금은 마을의 전체 30가정 중에서 올해로 8가정이 전도되었다.

90%이상이 노인으로 구성된 성도들과 참솔작목반을 일구다.

농촌의 많은 교회가 농사를 짓거나, 아동센터, 문화센터 등을 열어 농촌에 다양한 활동영역을 일구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성내교회의 경우 성도들의 90% 이상이 노인이며, 읍내와도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일궈나간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우선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간혹 젊은 부부나 아이들이 생기기라도 하면 이내 도심으로 이사를 가버렸다. 이곳은 지역 특성상 고랭지 지역이다 보니 겨울이 빠르게 다가오고, 농한기가 길기 때문에 주민 대부분이 수입이 적고, 어려운 가정들이다. 김 목사는 이러한 마을식구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던 중에 생각해 낸 것이 조합 활동이다.

이름 하여 참솔작목반! 김용선 목사는 사모와 함께 대출을 받아서 기계도 사고, 장독도 사서 마을 어르신들과 함께 참솔작목반을 꾸려나갔다. 감자떡도 만들고, 산나물을 캐서 말리고, 무청을 거두어 씨래기로 내다 팔며 왕성한 활동을 했다. 하지만 지나친 기대였을까? 사업이 번창하기 위해서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솥이 끓을 때까지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은 내일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신지 당장의 수입을 중요시하셨다. 시작할 때 받은 대출금을 갚아보기도 전에 결국 참솔작목반은 2년 전 부터 휴업에 들어가고 말았다.

돈 버는 일이 아닌 마을사람과 함께 마음 나누는 법을 익히다.

2년 동안 지은 농사는 유기농 농법을 고집해서 잡초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고, 목회활동과 겸하려니 오히려 지역주민에게 덕이 안 되어서, 제 작년부터는 농산물 판로개척과 목회활동에만 전념했다. 마을 이장활동으로 주민과 살을 비비며 서로를 알기에 노력하고, 절대 불교인 집안, 산을 섬기던 어르신 등 몇몇 집의 장례를 집도하면서 마을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이렇게 마을 일을 내 일처럼 나서다보니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몇몇 가정이 교회도 나오고, 어느새 성도들도 점차 늘어갔다. 게다가 열악한 시설이지만 꾸준히 찾아오는 여름수련회장도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시설 보수공사도 지속적으로 진행되다 보니 내년쯤이면 자립교회로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단다.

2012년을 목표로, 다시 한 번 참솔작목반에 도전하다.

“몇몇 분과 함께 내년부터는 더덕을 재배해 보려고요. 참솔작목반도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참솔작목반이 중단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젊은 일손이 부족하고, 어르신과의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할 사람이 없던 것이 가장 컸다. 하지만 이제 교회에 장년층도 늘어나고 있고, 농산물 판로개척도 계속해왔기 때문에, 내년부터는 지역주민과 함께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교회가 마을에서 자리잡고, 함께하는 유기체로써 인식되어간다면 지역적 특성을 이기고, 목회를 시작할 때 꿈꿔왔던 함께 어울려 선을 이루는 농촌 목회를 이룰 수 있지 않겠냐며 미소를 지으신다.


※작목반 - 농촌에서 작목별, 지역별로 조직을 5인 이상 구성하여, 공동생산 및 공동 출하를 하여 농촌의 소득을 높이기 위해 농협이 주관하여 만든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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