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고싶은청년'에 해당되는 글 16건

  1. [닮고싶은 청년 vol.35]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노래를 부릅니다
  2. [닮고싶은 청년 vol.34] 농활이야말로 힐링캠프죠. - 농어촌섬김 장학생 우예품
  3. [닮고싶은청년 vol.22] 따뜻하고 건강한 식사 한끼 하실래요? - 푸드포체인지 대표 노민영


 길가는밴드 리더 장현호 

 


길가다 볼 수 있는 흔한 인상이라 이름을 길가는 밴드라고 지었을까? 밴드의 리더 장현호 씨(36) ‘사람 좋아 보인다’는 말이 어울리는 수더분한 외모의 소유자다. 그렇지만 기타를 둘러멘 그의 모습은 다르다. 그는 거리에서 노래하는 사람이다. 그가 내뿜는 에너지는 길바닥을 크게 울린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 길바닥이 다른 어떤 곳보다 노래가 필요한 곳이라는 점이다.

 

다행히 우양재단의 사업현장도 그 길 위에 있었고, 운 좋게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탈북청년들을 격려하는 행사에서 들린 그의 노래는 평화를 말하고 있었다.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의 평화가 아닌, DMZ에서 다함께 춤을 추자는 올찬 평화였다. 울림이 있는 노래였다.

 

원래 그는 노래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연주자에 가까웠다. 군악대에서 드럼을 쳤고, 학교에서 베이스기타를 전공했다.‘부흥한국’이라는 팀에서 연주를 했고, 몇몇 밴드도 거쳤다.그러면서 직접 노래를 하고싶어졌다. 부흥한국에서 활동하며 통일에 대한 이슈를 접하고, 탈북민들을 만나면서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노래를 부릅니다

 

‘모든 사람의 입에 곡식을 공평하게 넣어주는 것이 평화. 평화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쌀을 팔아 그곳으로 달려갔지만 부끄러워 문밖에 두고 나왔는데 밥을 지어주고 싶구나.아이와 어른이 모두 한상에 모여 웃고 떠들며 둘러앉아 하얀 쌀밥을 나누면서 하는 말 이제 우린 한 가족이구나’ 


길가는 밴드의 대표곡 ‘쌀의 노래’의 가사가 이렇다. 그는 평화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누군가 제게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전 바로 ‘가사’라고 말합니다. 전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고, 그걸 그나마 효과적으로 표현 할 수 있는 게 노래거든요. 노래라는 방식으로 제 이야기를 하는 거죠. 노래를 만드는 과정도 같은 맥락이에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머릿속에서 계속 되뇌는 거예요. 그러다가 기타를 잡고 운율을 만들고 이야기를 가사로 얹는 겁니다”

 

선율이나 리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메시지라는 말이다. 그래서 주변으로부터 노래가 조금 길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포기할 수 없어 노래에 메시지를 조금은 꾸겨 넣은 느낌이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다.

 


요즘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말은요

“지금 만들고 싶은 노래의 제목은 ‘강 건너 불 보듯‘이에요. 얼마 전에 북한과 중국이 마주하는 조중접경 지역에 다녀왔어요. ‘장백현’이라는 곳에 갔는데 강 건너에 북한 사람들이 사는 모습들이 훤히 내다보이더라고요. 북한사람들을 직접 본건 저에게 충격이었어요. 거기도 사람 사는 동네인데, 그곳을 신기하게 느끼는 저를 보면서 그쪽 주민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어요. 망원경으로 그들을 보는 행동도 불편했고요.

 

소리 지르면 다 들릴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애써 모른척하고 농사짓고, 빨래하는 모습에 마음이 울컥했다. 같은 민족으로 서로의 존재는 의식하지만 대화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보면서 깨달은 게 있다. 진짜 평화는 직접만나서 이야기하고, 만질 수 있고, 서로 밥을 떠먹여 줄 수 있는 관계라는 거다. 이런 마음에 노래가 하고싶어졌다. 남과 북의 방대한 이야기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 이야기로 풀어내겠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이런 이슈가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북한 쪽을 쳐다보는데 마을도 보고, 소가 풀 뜯는 것도 보고, 농사짓는 사람들도 봤어요. 그러면서 저희 부모님 고향이 떠올랐어요. 저희 아버지가 섬진강가에 사셨고, 어머니는 강 건너편에 사셨거든요. 아버지가 강을 건너와 선을 보시고 어머니와 결혼하시고 제가 태어났는데요. 북한의 풍경과 부모님의 풍경이 오버랩되면서 감정이 북받쳐 왔어요”

 


노래하는 사람? 운동가?

 

그의 순수한 마음은 가끔 오해도 낳는다. 교회에서도 노래를 하는 그에게 가끔은 노래하는 사람인지, 운동가인지 질문하는 이도 있다.

 

“저는 밴드 U2를 좋아합니다. U2에는 기독교인인 멤버들이 있는데 그들을 팀으로 묶어준 기독교단체에서 음악 때문에 배척을 당한 적도 있다고 해요. 그래도 그들은 자신들이 부르는 노래가 바로 예배하는 거랑 다름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지금의 세계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밴드가 된 거죠. 저희 노래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분들도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싸이와 김장훈의 음악 중 무엇이 더 좋냐고 물어보면 전 김장훈을 선택할 거예요. 싸이의 음악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김장훈이 음악외적이 모습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들이 좋거든요. 사람들은 김장훈을 음악보다는 다른 것에 집중하는 게 아니냐고 평가하기도 하지만요”

 

그는 길 위의 노래와 교회 내 노래가 공존할 수 있다고 했다. 각각의 다른 장소에서 같은 노래를 불렀던 경험도 있었고, 메시지가 통하는 부분도 분명 있다는 거다. 양쪽 다 포기할 수 없는 그는 기독교음악 앨범과 길가는 밴드 앨범을 동시에 준비하고 있다.

 


“길 위에서 노래를 부를겁니다”

 

“사실 이런 이유로 적대감을 드러낸 사람이 많진 않았어요. 노래이기 때문에 허용되는 게 많아요. 노래는 좌우를 다 넘나들잖아요. 어렸을 적 많이 불렀던 작은 연못(김민기) 같은 노래의 가사를 다시보니 엄청난 임팩트가 있는 노래더라고요. 이런 노래를 만들고 싶단 생각을 했어요.”

 

그는 통일 이슈 외에도 관심사가 다양하다. 그리고 노래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억울한 노동자들의 곁을 지키러, 사고의 비참한 희생자들을 위로하러, 탈북자들의 조그만 외침에 힘을 보태려 전국을 누빈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그들을 추모하는 노래도 만들어 불렀다.

 

“제 꿈은요. 제가 늙어서 노래를 부를 수 없는 날이 올 때까지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만약 그사이에 통일이 된다면 통일을 기대하면서 부른 노래가 통일 전의 과거를 회상하는 노래로 바뀌겠죠. 그렇게 되면 세계평화에 집중한 노래를 불러야할지도요 하하하.

 

 

 

 

 

 

농어촌 목회에 관심 가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농촌엔 답이 없다고 생각했죠. 그러던 중 만난 우양은 농어촌에서 목회를 하는 우리 가정과 교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주었어요. 우양과의 만남이 우리가족에겐 위로였어요.”

 

우양의 여름은 농촌봉사활동으로 시작한다. 여름방학을 맞은 청년들은 농어촌에 있는 작은교회을 기점으로 농촌봉사활동을 펼친다. 우양청년들은 단순히 농사에 일손을 보태는 것뿐만 아니라 마을주민들을 위한 문화, 교육, 복지 전반에 해당하는 프로그램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그러다보면 농활이 기존에 알던 농어촌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예품(23)씨도 그 중 한사람이다.

가는 곳마다 펼쳐지고 있는 다양하고 역동적인 일들에 놀라고 있어요.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농촌에 어떻게 이런 일들이 있는지 정말 흥미로워요. 제가 알던 농촌은 이렇지 않았거든요.”

 

 

 

 

사실 예품씨는 농촌이 익숙하다. 초등학생 때 전학을 와서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농촌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시골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어요. 그 전까지는 서울에서 부족함 없이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시골교회 목사 딸이 되었어요. 농촌생활에 적응하는 것도 힘들었고 갑자기 사람들이 저를 목사 딸이라고 부르는 것도 힘들었어요.”

예품씨의 아버지는 그녀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쯤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사춘기에 접어들 때부터 목회를 시작했다. 그녀는 변한게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목회를 시작하기 전까지 저는 서울 강남에 살았거든요. 친구들은 저보고 서울깍쟁이이라고 놀렸고 선생님은 제가 목사 딸이니까 참으라고 했어요. 그게 농촌에 대한 저의 첫 인상이었어요. 숨을 쉴 수가 없었어요.”

새로운 학교에 적응이 힘든 것도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그녀의 가정이 순식간에 바뀐 것도 농촌으로 이사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만나는 사람들 마다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양보와 배려를 강요하는 것도 도시로 나가면 금세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시가 그리웠어요. 그래서 가끔씩 도시에서 누가 온다고 하면 그렇게 설레었나봐요.”

조용하고 평화롭던 농촌교회가 부산스러워지는 날이 있다. 도시에서 손님이 오는 날이다. 온 가족이 몇 번이나 작은 예배당과 집을 쓸고 닦았다. 그 손님들이 도착한 것만으로 마을에 온통 활기가 돌았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녀는 분명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 저는 농활을 가면 제일 먼저 그 교회 목사님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요. ‘농촌교회 목사 딸이 어떤 느낌인지 저는 잘 알거든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는 작은 결핍이 있어요. 그걸 위로해 주고 싶어서요.”

그 시절 도시에서 온 손님들은 그녀와 그녀의 가정을 환기 시켰다. 이렇게 작은 농촌마을에 있는 한 목회자 가정을 잊지 않고 찾아와주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이었다.

농어촌 목회에 관심 가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농촌엔 답이 없다고 생각했죠. 그러던 중 만난 우양은 농어촌에서 목회를 하는 우리 가정과 교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주었어요. 우양과의 만남이 우리가족에겐 위로였어요.”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예품씨는 그 때의 기억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농활에 참여하고 있다. 올해만 벌써 세번째다.

어렸을 때는 농촌에 사는 게 참 싫었는데 철이 들고 나서는 농어촌교회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잖아요. 우양을 통해서 농어촌에 방문하고 조금이나마 그곳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저는 좋아요.”

 

 

 

지금은 농활을 통해서 농어촌을 돕는 것이 전부라고 말하지만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일에도 열심이다.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는 그녀의 꿈은 음악치료사이다.

음악치료를 통해 마음은 물론이고 몸까지도 치료가 가능하다고 해요. 내가 전공한 음악을 통해 누군가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대학원공부도 해야 하고 앞으로 배워야 할 것도 많아요. 하지만 꼭 음악치료사가 되어 제일 먼저 목회자 자녀들을 돌보고 싶어요.”

우양의 농활은 계속된다. 물론 예품씨도 함께한다.

농활을 다녀오면 참 좋아요.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직접 땀 흘리며 배우는 것도 많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받고 또 힘을 얻어요. 다양하게 그리고 활기차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농촌에도 희망이 있다는 걸 느끼죠. 더 많이 청년들이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농활이야 말로 정말 힐링캠프거든요.”

 

 

 

 

 

 

 

 

보름간 스페인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스페인에서 진행되는 지역 먹거리 운동을 직접 눈으로 보고 참여하는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 다녀오니 하고 싶은 것들이 더 많아져다며 건강한 미소를 짓는다. 사단법인 푸드포체인지의 노민영(34) 대표다.

 

지금은 식생활과 먹거리 분야에서 전문가로 불리고 있지만 20살의 그녀는 통계학과 학생이었다. 남들보다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고 맛있는 음식을 좋은사람들과 나누어먹으면 행복했다는 것이 특별하다면 특별한 점이었다. 그때부터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그녀는 푸드스타일리스트로 활동했고 음식전문잡지사와 외식업체 마케팅팀에서도 근무를 했다.
“처음에는 음식을 먹고 즐기는 것에 관심이 있었어요. 그냥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죠. 그러다 언젠가 부터 우리의 먹거리 문화 이면에 있는 사회적 현상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때 슬로푸드(slow food)운동을 알게 됐어요.”

 

지속가능성 있는 먹거리 문화를 고민하다

 

그녀는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이 한 끼 식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 한 끼 식사의 변화는 우리의 삶과 사회가 변화하는 첫 걸음이라는 것이다.
“슬로푸드 운동을 접하면서 먹거리에 대해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당시 한국에서 먹거리와 관련하여 배울 수 있는 것은 식품영양이나 식품과학정도거든요. 제가 공부하고 싶었던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유학을 결심했죠.”
국제슬로푸드연맹에서 설립한 이탈리아 미식과학대학(University of Gastronomic Science)은 문화, 역사, 경제, 인류학, 심리학 등등 음식에 사회과학적 측면으로 접근하여 교육을 한다. 물론 그 기저에는 슬로푸드의 철학이 깔려있다. 그녀는 이곳에서 새롭게 공부하고 지속가능성있는 먹거리문화에 대한 고민을 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건강한 먹거리의 조건

 

유학에서 돌아왔을 당시 한국에도 슬로푸드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생기고 있었다. 발빠르게 관심을 가지는 단체들이 생겨 함께 일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희망제작소와 풀무원에서 먹거리와 관련한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겠다고 결정하고 그 적임자로 그녀가 추천되었다. 그리하여 사단법인 푸드포체인지가 설립된다. 푸드포체인지는 교육과 캠페인으로 소비자와 생산자의 의식을 개선하여 식생활 문화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지속가능성의 관점으로 봤을 때 먹거리 문제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푸드포체인지의 기본철학은 누구나 좋은 먹거리를 먹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먹거리시장에서 좋은 먹거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마트에 쏟아져 나오는 저렴한 수입농산물과 첨가물로 맛을 낸 여러 가지 식품들은 좋은 먹거리를 먹겠다는 소비자들의 의지를 사라져 버리게 한다.
“건강한 먹거리의 첫 번째 조건은 우리땅에서 자란 제철음식이예요. 유기농이니 친환경이니 하는 건 사실 그 다음 이야기고요. 또 식품첨가물보다는 천연재료로 만들어진 가공식품을 고르는 것이 중요하죠. ‘우리동네 장담그기’도 이런 맥락에서 시작했어

요.”

 

 

‘진짜’맛을 찾다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식생활 교육이나 성인들과 함께 하는 기획강연들을 진행하면서 동일하게 나온 결론은 현대인들은 진짜 맛을 잃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가짜 맛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 제일 먼저 간장, 된장, 고추장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요리의 기본이 되고 있는 필수적인 양념에까지 가짜 맛이 섞여있거든요. 그래서 함께 장을 담그기 시작했어요.”
도시에 살면서 개인이 장을 담근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여럿이 모이니 가능했다. 40명 정도가 되는 참가자들이 공동으로 장독을 마련하고 필요한 만큼 분양을 했다. 장을 담그고 관리하는 일까지 힘을 모아 진행하고 있다. 함께하니 즐거운 일이 되었다.

 

장독을 나누다

 

장 담그기가 한창 진행될 즈음 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을 대상으로 식생활교육을 진행했다. 지역아동센터를 교육을 끝내고 나올 때는 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교육을 하고 나올 때 마다 마음이 불편했어요. 식생활 교육에서는 첨가물이 들어간 음료나 과자는 건강하지 않은 음식이라고 가르쳤거든요. 그런데 센터에는 늘 그런 간식들이 가득했어요. 주방에서 사용하는 기본 장들도 화학조미료가 많이 들어있는 대기업의 제품들이 즐비했고요. 그래서 펀딩을 시작했어요.”
건강한 먹거리를 선택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무조건 건강하지 않은 먹거리를 먹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책임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만드는 건강한 장을 그 아이들과 나누어 먹고 싶었다. 펀딩을 통해서 지역아동센터에 나누어줄 장독을 분양 받았다. 장을 담그고 관리하는 것은 기존 회원들이 도왔다.
“장 담그는 일은 1년이 걸리니까요. 겨울까지 잘 익혔다가 맛있는 장을 전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장 담그는 과정을 함께 이야기하고 직접 담근 장을 맛보게 하는 것만큼 좋은 교육이 있을까요."

 

 

 

푸드포체인지에서는 7월부터 푸드케이터 양성과정을 개설한다. 연 350회 정도의 바른 식생활강의를 기존 강사로 충당하기 버거워졌기 때문이다.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기획강의도  연일 진행 중이다.
“2주간 사무실을 비워서 사무실에 할 일이 쌓여있을 거예요. 사무실 직원은 저를 포함해 2명뿐인데 일은 쉴 틈 없이 늘어가고 있어요. 가끔은 힘들지만 좋은 사람들과 따뜻하고 건강한 밥 한끼 나누어 먹는 일이라 다시 힘을 낼 수 있어요. 밥상을 같이 한다는 것은 삶을 함께 한다는 뜻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