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나무는 단풍이 들고, 어떤 나무는 열매를 맺는 계절. 풍경은 가을 같고, 바람은 겨울 같던 11월의 오후. 미영씨(가명)가 살고 있는 양천구 신정동 집으로 갔다. 그녀는 우양에서 진행하는 탈북청년 지원 프로그램 심연의 대상자다.

미영씨는 따뜻한 전기장판 위로 우리를 안내했다. 몸을 녹일 차도 권했다. 하지만 그날 오후를 이토록 따뜻하게 기억하는 건, 비단 추운 어느 날 들어간 실내의 온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2시간의 거리, 9년의 세월

미영씨는 내가 여태껏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잘 웃는 사람이었다. 말과 말 사이, 그녀는 침묵 대신 미소를 지었다. 탈북하는 과정을 이야기할 때도 그랬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그 여정을 이야기해줄 수 있냐고 물었고, 괜한 미안함에 너무 오래된 일이죠…?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녀는 옅은 미소를 띠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건 잊어버릴 수가 없어요.”

어릴 적부터 미영씨는 엄마를 따라서 함경북도와 개성을 오가며 장사를 했다. 학교도 빠져가며 일했지만, 가계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북한이 최악의 식량난을 겪던 1998, 미영씨는 오로지 살기 위해서 탈북을 결심했다.

천신만고 끝에 국경을 건넜지만, 중국에서 힘없는 탈북여성은 인신매매나 강제결혼의 표적이었다. 그녀 역시 팔려갈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좋은 조선족을 만나 그 집으로 피신했고,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거짓신분으로 살아가는 삶은 늘 불안했다. 언어문제도 있었고, 임신한 몸으로 밭일을 해야 할 정도로 생활도 어려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매사 전전긍긍해야하는 삶이었다. 그건 또 다른 차원의 공포였다.

 

결국 미영씨는 한국행을 결심했다. 쉽지 않은 결심이었지만 이렇게 긴 여정이 될 줄은 자신도 몰랐다. 당시 살고 있던 하얼빈에서 베트남으로 갔고, 캄보디아 땅까지 지나고 나서야 마침내 대한민국, 서울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개성에서 서울, 채 두 시간이 안 되는 거리, 하지만 그녀에게는 꼬박 9년이 걸린 셈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여정

이제 미영씨가 한국에 온지도 6년이 되었다. 첫째 동원이(가명)5학년이 되었고, 둘째 동현이(가명)은 갓 20개월이 지났다. 그녀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아이들 병원비다. 중국에서 제대로 못 먹인 탓인지 동원이는 유독 몸이 약해 자주 병원신세를 진다.

둘째 동현이(가명)는 50일이 되던 날 신장에 염증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 미영씨의 마음은 덜컹 내려앉았다. 아픈 자식을 보는 것도 마음이 무너지는 일이지만, 당장 퇴원할 때 내야하는 병원비가 걱정이었다. 아픈 아이를 옆에 두고 돈을 걱정해야하는 상황도 답답했다.

 

이곳에서 그녀를 부르는 많은 말이 있다. 탈북자, 새터민. 하지만 내가 만난 미영씨는 두 아이의 엄마였다. 우양에서 지원해주는 것으로 아이들 기저귀나 옷가지를 살 수 있다고 했다. 한국에 온 이후로 식당일, 행상일 등 안 해본 일이 없지만, 세 살배기 둘째 때문에 지금은 일을 할래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미영씨와 아이들의 표정만 봤을 때는 짐작할 수 없는 속사정이었다. 하지만 미영씨는 자신이 운이 좋다고 했다. 고되고 길었던 9년의 여정, 그 길목에서 기꺼이 그녀를 돌봐줬던 사람들이 있었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면서.

 

미영씨는 매달 우양에서 저소득 어르신들께 쌀을 배달해드리는 봉사를 했다. 둘째 아이가 생긴 뒤로는 첫째 동원이를 대신 보낸다. 자신은 배운 것이 없어 공부를 가르치기는 어렵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봉사를 하면 느끼는 것이 있지 않겠냐고도 말했다.

 

 

 

평범한 것들이 평범해지는 기적

돌아가는 길, 꿈을 묻는 내게 미영씨가 한 말이 계속 맴돌았다.

아이들 건강하고 저는 돈을 버는, 평범한 것들이 평범하게 느껴지는 그런 일상이요.”

그 날 나는 탈북가정을 방문하러 갔다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 느끼며 돌아왔다.

 

누군가는 말했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의 아픔을 헤아릴 수 있는 거라고. 그건 아마 아픈 아들을 간호하던 미영씨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아픔의 깊이를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엄마만을 바라보는 아이들을, 그 아이들이 있기에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 미영씨의 마음을 가늠해볼 뿐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한 사람의 아픔을 헤아려보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가 아닐까, 하고.

차창 밖으로 나무들이 지나갔다. 어떤 나무는 노랗게, 어떤 나무는 붉게 물들었다. 또 어떤 나무는 열매를 맺고, 어떤 나무는 낙엽을 떨궜다. 나무처럼 우리도 서로 다르다. 이해에 점 하나 더하면 오해라는데, 하물며 서로 오갈 수 없는 땅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오죽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에게 의미가 된다. 미영씨를 도와준 사람들처럼. 미영씨가 돕는 어르신처럼. 동원이와 동현이의 희망이 미영씨이고, 미영씨의 희망이 아이들인 것처럼. 그리고 나는 미영씨의 평범한 기적을 응원할 것이다. 누군가의 아픔을 헤아려보는 일은 번거롭고, 나의 것을 나누는 결심은 어렵다.

그러나 분명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